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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_繪畵 : Painting / Painture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18. 20:27

 

회화(繪畵: Painting/Painture)

 

  종이·패널·유리·비단·캔버스 등의 2차원적 평면이나, 동굴이나 사원의 벽 등 특정한 장소에 구체적인 형상이나 이미지를 표현한 조형예술. 애초에 생존을 위한 주술적 맥락에서 형성되었으나 점차 종교적·장식적 목적으로 제작되었다가 자기표현적·자율적인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려진 장소나 부위에 따라 암각화(岩刻畵)·벽화(壁畵)·제단화·타블로화 등으로 분류되며, 사용되는 재료와 기법에 따라 프레스코·템페라·모자이크·스테인드글라스·유채·수채·소묘·판화· 콜라주·몽타주·수피화(樹皮畵)·수묵·담채 등으로 분류한다. 또한 그 속에 담긴 내용이나 주제·양식적 특성 혹은 그려진 대상에 따라 종교화·풍속화·역사화· 초상화·풍경화·산수화·정물화·영모화(翎毛畵) 등으로 나뉘며,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양식인 추상회화도 서정적 추상·순수색채추상·기하학적 추상·추상표현주의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재료기법·양식·표현대상·주제는 각 시대의 사회적 또는 회화 내적인 요청에 따라 변화되었으며, 미술의 역사는 거의 회화사라 할 정도로 회화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전개되어왔다. 【조형요소】 건축이나 조각 등이 실제공간 속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대상이라고 한다면, 회화는 깊이가 없는 공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화가들은 색채와 형태에 의존한다. 색채가 없는 회화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으며, 굳이 색칠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화면 자체가 지닌 고유한 색과 그 위에 그려진 대상의 농담(濃淡)에 의해 형태가 드러날 수 있으며, 그리는 행위와 더불어 색채가 개입하게 된다. 따라서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형요소는 색채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색채란 기본적으로 빛과 긴밀한 관련을 지니며, 스펙트럼이 나타내는 6가지 기본색(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보라)처럼 개별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색의 성질인 색상, 밝기의 정도를 나타내는 명도, 색상의 강렬한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채도의 3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2차원적인 평면에 남겨진 어떤 흔적이 회화이므로, 평면이라는 ‘공간’ 또한 회화의 중요한 조형요소가 된다. 그러나 회화의 공간이란 삼차원적인 입체물처럼 깊이가 없으며 설령 원근법·명암법 등을 이용해 삼차원적인 공간감과 입체감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공간의 환영’에 불과하다. 여기에 부가하여 회화의 조형요소로 평면 위에 남겨진 물감의 흔적으로서의 질감과 소묘의 기본이 되는 선(線)을 추가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요소들은 상호불가분의 관계 속에 회화를 구성하는 특징이 있다. 회화에 있어서 조형요소란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주제를 훌륭하게 구현하기 위해 동원한 것, 즉 그 작품의 내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이것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형식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조형요소를 화면 위에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재료와 기법인 만큼 화가들은 자신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기존의 재료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자신의 작업방향에 어울리는 재료 및 기법을 개발하기도 한다. 원리상 회화는 점성이 강한 물질, 즉 물감을 화면 위에 칠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런 면에서 다양한 재료기법을 동원할 수 있으다.

 

【서구회화의 역사】

 〈기원〉 회화의 기원을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기원을 밝히는 것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미술의 기원을 BC 15000~BC 100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나 라스코지방 동굴벽화로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구석기 원시인들은 수렵과 약탈, 채집의 기생경제에 의존했던 사람들로서 동굴 벽에 들소·순록·사슴 등의 동물그림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동굴벽화가 동물의 형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과 주거공간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그려진 점, 나아가 그림 위에 계속 중첩해서 동물을 그려놓은 점을 볼 때, 동굴을 장식하거나 본능적인 표현욕구의 발로가 아니라 동물과의 투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마술적·주술적 맥락에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즉, 원시동굴 벽화는 들판에 뛰어다니는 동물을 대체한 것으로, 원시인들은 동물을 그림으로써 그것의 가공할 힘을 빼앗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원시예술가들은 동물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동물그림이 완성되면 그 동물의 위력을 박탈했으므로 위험에 대한 공포심 없이 사냥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석기 시대 화가들은 외계의 현상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지닌 사냥꾼이자 마술사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농업을 시작함에 따라 기생경제 아래의 유동적인 생활로부터 땅에 정착하게 되고, 비로소 목축·경작의 생산경제를 꾸려갈 수 있었다. 신석기 농업혁명은 구석기 시대의 일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변화, 발전하게 만들었다. 즉 경작을 위해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을 축적해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가뭄·홍수 등 자연의 무서운 힘을 제어하는 신령한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됨에 따라 원시종교(애니미즘)가 나타났다. 신석기시대에 농업경제로의 이행과 종교의 발생은 예술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가 퇴색하고 대신 단순하고 추상화된 벽화가 나타나게 된다. 또 농업과 관련한 실용적인 공예의 발달은 이것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고대 오리엔트〉

 BC 6000년경 근동지방에서 문명이 형성되었으며, 요르단의 예리코와 아나톨리아의 샤탈휘위크에서 발굴된 유적은 신석기 혁명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보여줌과 동시에, 샤탈휘위크의 벽화들은 오늘날 지도와 풍경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도시를 표현한 그림들이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이로부터 3000년 후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출현과 더불어 문자가 발명되며, 인류는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 중국의 황허강 유역에 살고 있던 인간들은 문명의 발생과 함께 새로운 세계에 접하게 됨으로써 창조에의 욕구도 높아져 갔다. 특히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의 벽화와 파피루스에 그린 그림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집트 화가들은 무덤주인이 누렸던 현실세계의 연장이자 그 증거로써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들은 이집트 조각처럼 영원불멸하는 부동성과 정면성을 보여준다.

 〈그리스·로마〉

 그리스는 건축·조각의 발달을 보여주는 유적·유물이 많은 반면 회화의 유물은 적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크레타의 경우 BC 1500년경 크레타인들의 풍속을 보여주는 《투우사의 벽화》와 같은 훌륭한 회화작품이 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제욱시스(Zeuxis)와 같은 화가들이 탁월한 재현능력으로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을 볼 때, 회화 역시 건축·조각 못지않게 발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 회화의 특성은 주로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이 그림들은 조각에서 사용한 단축법(短縮法)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대상을 훌륭하게 재현했음을 보여준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현실적·세속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로서 회화에서도 장식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로마회화의 풍부함을 보여주는 것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으로,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풍경화·정물화·초상화 등을 애호하였다. 그 중 폼페이에서 발굴된 《디오니소스의 비의(儀)의 장면들》은 인간적인 현실과 신화적인 내용이 연극적인 구조 속에 결합되어 있다. 그들은 패널 위에 밀랍으로 안료를 정착시키는 납화법(蠟畵法)을 사용하여 생생하고 감각적인 색채를 보존했으며, 또한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해 신전·저택의 마룻바닥과 벽을 장식하였다. 대표적인 모자이크로 된 벽화로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다리우스 3세의 대군을 무찌르는 전투장면을 묘사한 《이소스 전투》가 있다. 로마황제들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에서 종교의식을 가졌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기적과 종교적 교의를 전달하기 위해 상징적이고 단순한 그림으로 교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회화의 이런 법칙은 후에 중세회화의 중요한 규범으로 정립되었다.

 〈중세〉

 중세에는 형상을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배격했기 때문에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회화의 발전이 미약했지만, 종교적 내용을 담은 상징적이고 교의적인 회화가 주로 필사본 삽화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중세회화는 동·서로마제국의 분리 이후 동로마제국에서 나타난 비잔틴 미술의 모자이크 벽화와 종교적 규범을 충실히 준수한 성상화(icon),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 내부를 장식했던 프레스코화, 고딕양식 건축에 사용된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중세 말경 이른바 후기고딕시대의 필사본 삽화 등으로 나뉜다. 특히 라벤나성당,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하기아소피아의 모자이크 벽화는 비잔틴회화의 우수함을 보여주며, 비잔틴 성상화의 전통은 동방정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세 말기의 후기고딕양식을 반영하는 랭부르 형제의 《극히 호화로운 베리공의 기도서》에 나타난 풍속화들은 르네상스 회화의 출현을 예고한다. 〈르네상스〉 르네상스 회화가 이룩한 성과는 원근법의 정립이며, 이것은 20세기 입체파가 등장할 때까지 서구회화를 지배한 공간표현의 원리였다. 르네상스는 시기에 따라 14세기(trecento), 15세기(quatrocento), 16세기 또는 전성기(cinquecento) 르네상스로 분류되며, 지역적 특징에 따라 이탈리아·프랑스·북유럽 르네상스로 나뉜다. 르네상스의 회화는 피렌체의 치마부에와 조토로부터 시작되며, 시에나의 두초, S.마르티니를 거쳐 마사초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마사초로부터 양체표현(量體表現)과 원근법을 터득, 입체적 구도의 조형적 인물상을 보여준 F.안젤리코, 그림 속에 보다 풍부한 현실성을 구현한 A.만테냐, 수학적 비례를 회화에 적용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비너스의 탄생》에서 신화를 회화적 알레고리로 해석한 S.보티첼리 등은 F.브루넬레스키와 L.B.알베르티가 이론적으로 정초한 원근법을 회화 속에 구현하였다. 르네상스 회화의 생생한 실재감은 원근법·명암법의 정립 및 해부학의 발달, 실제 모델의 사용 등과 무관하지 않다. 르네상스 회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티치아노 등과 같은 천재들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중세시대의 경우 교양학과(liberal arts)에도 편입되지 못했던 회화를 학문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렸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통해 고양된 정신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 나타나는 매너리즘적 징후를 보여주며, 라파엘로는 귀족적이고 궁정적인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미를 완성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프랑스 등 중·서부유럽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쳐, 프랑스의 J.푸케는 이탈리아로부터 중세회화의 경직성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탈리아의 이상적인 미의 관점으로 볼 때 중세적 전통에 가까우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한 중·서부유럽 화가로는 에이크 형제와 《이젠하임제단화》를 그린 M.그뤼네발트, 이들에 비해 이탈리아 화풍에 보다 가까이 접근한 A.뒤러 등이 있다.

〈마니에리스모·바로크·로코코〉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 나타난 기이하게 변형·왜곡된 화풍을 르네상스 이상미의 잘못된 모방이란 의미에서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이라고 부른다. 16세기 마니에리스모는 틴토레토·브론치노·파르미자니노·엘 그레코 등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로마침범, 독일의 카를 5세에 의한 로마의 약탈 등에 의해 야기된 종말론적 분위기가 이들로 하여금 보다 종교적 정신주의로 몰입하게 만든 동인(動因)이었음을 알려준다. 즉 사회적으로 팽배한 위기의식으로 르네상스적 조화와 안정이란 허구가 해체되고, 종교에 귀의하는 주지주의적 회화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P.브뢰겔의 일련의 농촌 풍속화와 우의화(寓意畵)들은 이탈리아 마니에리스모의 우주적 세계관을 범신론적 자연주의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마니에리스모는 J.브루크하르트나 H.뵐플린이 말한 것처럼 르네상스의 타락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을 반영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바로크 회화의 가치를 발견한 미술사학자는 뵐플린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서로 대립되는 특징, 즉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폐쇄적인 것과 개방적인 것,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 다양한 것과 단일한 것 등으로 나누어 비교, 고찰하였다. 바로크 회화 역시 지역적·종교적 특징에 따라 가톨릭적·귀족적인 경향과 프로테스탄트적·시민계급적인 경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의 화가로 가라치 가족과 N.푸생, P.P.루벤스, D.R. de S.벨라스케스 등 반종교개혁운동을 통해 종교미술의 부흥을 꾀했던 이탈리아나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했던 에스파냐 등의 궁정화가를 들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로 H. van R.렘브란트, F.할스, J.베르메르 등 주로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해 시민계급의 권력이 증대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이 확산되던 중유럽 작가를 들 수 있다. 이들 외에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와 에스파냐의 J. de 리베라, 프랑스의 G. de 라 투르 등이 바로크 화가에 해당한다. 17세기 절대왕정 시대에 이르러 프랑스가 비로소 유럽미술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이 시기에 형성된 고전주의는 18세기에 이르러 귀족적인 우아한 양식으로 변화하는데, 와토, 샤르댕, 프라고나르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귀족 취향을 로코코라고 부른다. 18세기 영국에서는 W.호가스와 같은 도덕적 풍속화가와 영국 상류사회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J.레이놀즈, 그리고 T.게인즈버러와 같은 화가들이 나타났다.

〈19세기〉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에 의해 촉발된 근대시민사회와 더불어 시작된 19세기는 회화의 발전이 극성을 이루던 시기였다. 로코코의 귀족적 취향으로부터 벗어나 고전주의 엄격한 화풍을 복원한 J.L.다비드의 신고전주의가 혁명의 공식미술로 인정받다가 후에 나폴레옹 제정의 어용회화로 전락한 한편, 혁명이 성취한 자유의 이념을 회화에 실천하고자 했던 사조가 낭만주의이다. 들라크루아, 제리코와 같은 화가들은 J.L.다비드와 J.A.D.앵그르의 신고전주의에 나타나는 미의 이념을 개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에 의한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로 바꿔놓았다. 낭만주의에 맞선 G.쿠르베는 현실의 진상(眞相)에 주목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반영하고자 한 사실주의 회화를 정초하였다. 한편 에스파냐 궁정화가이면서 낭만주의적 특징을 보여주는 F.J.de 고야와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였던 W.블레이크의 회화는 프랑스 낭만주의와 다른 맥락에서 주관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한 세계를 드러내며, 독일의 C.D.프리드리히 또한 슈베르트의 가곡에서 특징적인 낭만적 서정성을 반영하는 그림을 그렸다. 한편 영국의 풍경화가 J.M.W.터너와 J.컨스터블의 그림은 인상주의 출현을 예감하게 한다. 19세기 후반 유럽회화를 지배했던 것은 인상주의로서 회화의 자율성의 획득이라는 과제가 인상주의에 의해 성취된다. 인상주의자들은 관전(官展)인 살롱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모아 ‘독립전’을 개최하고, 졸라 등의 문학가들과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부르주아 취향에 대한 분노와 새로운 미학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며, 외광(外光) 아래서 순간적 인상을 화면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해돋이-인상》이란 작품으로 인상주의란 명칭을 유발시킨 C.모네의 그림은 빛과 색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형태가 와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양식과 경향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E.마네 역시 근본적으로 외광파이지만 보다 사실주의에 가까우며, E.드가는 무용수의 운동감을 포착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인상주의들이 그들의 미적 이념 성취를 위해 자연대상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지만, 찰나적인 인상의 표현을 위해 도시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를테면 모네의 《생라자로역》과 P.A.르누아르의 도시민의 야유회, 점묘법을 통해 보다 과학적인 회화에 근접한 G.쇠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휴일 오후, H.de 툴루즈 로트레크의 물랭루즈와 보트놀이, 도시의 번화한 모습 등은 자연에서 포착할 수 없는 순간적·유동적인 아름다움을 도시에서 찾고자 한 그들의 태도를 반영한다. 인상주의는 또한 V.van 고흐, P.고갱, 그리고 P.세잔과 같은 후기인상주의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초기의 고뇌를 반영하고 있는 우울한 그림으로부터 남프랑스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빛나는 자연을 용솟음치는 터치로 표현한 고흐가 표현주의에, 타히티로 떠난 고갱의 탐미주의가 상징주의에, 형태의 보다 견고한 구축을 위해 노력한 세잔은 입체주의 미술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들은 19세기의 미술의 방향을 20세기를 향해 돌려놓았다. 또한 19세기 말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경향으로 상징주의를 들 수 있으며, A.뵈클린, D.G.로제티, O.르동, P.de 샤반느, G.모로는 내면의 신비와 신화적 몽환의 그림을 그려냄으로써 낭만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상력의 문제를 보다 집요하게 추구함은 물론 형상의 마술적 힘을 문학성과 결합시키고 있다. 한편 상징주의는 G.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나 E.뭉크의 작품 속에도 나타난다.

〈20세기〉

 20세기 초반의 회화는 H.마티스와 A.드랭, G.루오 등의 야수파와 P.피카소와 G.브라크, J.그리스, F.레제 등의 입체파, E.뭉크를 비롯하여 E.실레, E.L.키르히너, O.코코슈카, F.마르크, P.클레, E.놀데 등 주로 독일·오스트리아 출생 화가들에 의해 전개된 표현주의와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 사회비판적인 경향을 그린 G.그로스, O.딕스, M.베크만 등의 신즉물주의가 있다. 또한 1909년 F.T.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에 의해 촉발되고, 그림 속에 속도를 표현하고자 한 U.보초니, G.발라, C.카라 등의 미래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방법에 호소한 J.아르프와 M.뒤샹, F.피카비아와 같은 다다이즘, 다다의 우연성을 계승하여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잠재된 욕망을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한 G.de 키리코, M.에른스트, S.달리, R.마그리트, J.미로 등의 초현실주의, 자율적인 추상회화의 세계를 개척한 W.칸딘스키와 P.몬드리안,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K.S.말레비치, A.M.로드첸코 그리고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모여든 파리파 화가들, 멕시코 혁명기의 D.A.시케이로스, D.리베라, J.C.오로스코와 미국 공황기의 벤샨 등에게서 발견되는 표현주의, E.호퍼 등 미국 사실주의 회화 등을 통해 볼 수 있듯이 현대적이고 전위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미래주의·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와 같은 아방가르드 회화의 부상과 더불어 20세기 현대회화에 두드러진 것이 추상회화의 형성 및 급속한 확산이며, 이것은 대상의 재현을 목표로 했던 회화의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벗어나 순수시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의 세계를 펼치는 시금석이 되었다. 추상회화의 확산은 전후 미국 미술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으로 정립된 C.그린버그의 ‘평면성의 원칙’을 낳게 하였으며, 그것은 J.폴록과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수사학이 F.P.스텔라, J.올리츠키, R.모리스의 미니멀리즘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였다. 전후 현대회화에 대한 사적 정리는 시간적 거리를 필요로 한다.

 

【중국회화의 역사】

 은(殷)나라 때 그림과 글씨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갑골문자를 발명하였던 중국은 진(秦)나라에 이르러 통일국가를 형성했으며, 한(漢:BC 202~AD 220년)나라 때의 왕들은 진시황의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기억을 해소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무위자연 정책을, 대외적으로는 흉노와 전쟁을 하거나 회유책을 폈다. 한무제는 흉노에 쫓겨난 대월지(大月氏)와 동맹해 흉노에 대항하고자 장건(張騫)을 서역에 파견했는데, 이 정책은 실패했으나 장건의 출병에 의해 실크로드가 열리게 되고 중국과 서구의 문물교류가 이뤄졌다. 한대 회화는 고분벽화에서 그 면모를 알 수 있고 후한(後漢)시대에 불교가 정착함으로써 불교미술이 나타났으며, 특히 종이의 발명은 회화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동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북조(南北朝)시대, 특히 북조(北朝)에 이르면 외래문화의 영향 아래 둔황의 모가오굴[莫高窟] 등과 같은 석굴 축조가 이루어지며, 이 석굴 속에 불교전래 및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시기에 ‘부감법(俯瞰法)’이 성립하였으며, 동진(東晉)의 고개지(顧愷之) 등이 처음으로 산수화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육조(六朝)의 사혁(謝赫)이 육법 중 기운생동(氣運生動)의 회화를 본령으로 제시함으로써 동양회화 품평의 기초가 확립된다. 수(隋:581~618)나라는 북주를 계승하여 남조의 진(陳)을 통합한 통일왕조로서 회화에서도 북조계가 남조의 양식을 흡수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수나라에 이어 당(唐:618~907)나라는 외국 미술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중국화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당대 전기에 나타난 형사(形似)의 개념은 헬레니즘 영향을 반영한 인도의 굽타양식과 사산왕조 양식을 중국식으로 발전시킨 자연주의적 표현기법이며, 불교회화에서는 대승적인 변상도가 많이 그려졌고 인물초상화도 발달하였다. 당 전기의 화가로 《역대제왕도》를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오도현(吳道玄)이 있으며, 그는 형사를 대신하는 회화의 지도이념인 사의(寫意)를 제창함으로써 수묵산수화 발전의 기초를 세웠고, 왕유(王維)는 파묵적인 수묵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당나라가 망한 후 오대(五代)를 거쳐 송대(宋代)는 북송(北宋:960~1126)과 남송(南宋:1127~1279)으로 나뉘는데, 남송시대에 이당(李唐)의 영향 아래 마원(馬遠)·하규(夏珪) 등의 직업화가에 의해 원체화(院體畵)가 형성되었으며, 이 화풍은 명대의 절파와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 이후의 회화에 영향을 주었으나, 명대 문인화의 숭상과 더불어 화공의 그림으로 경원시되었다. 송나라를 정복한 몽골족에 의해 세워진 원대(元代:1271~1368년)의 회화는 매우 복잡하며, 이러한 양상은 명대에 이르러 절파(浙派)와 오파(吳派) 등이 형성되는 동기가 되었다. 원초의 산수화는 고극공(高克恭), 조맹부(趙孟) 등에 의한 복고운동으로부터 황공망(黃公望)·예찬(倪瓚)·오진(吳鎭)·왕몽(王蒙)의 산수화 4대가에 의해 고도로 지적이고 문학적인 성격의 산수화가 나타났다. 또한 원나라의 문인화가 조맹부는 송설체(松雪體)라는 서체를 개발, 고려 말 한국에 유입되어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한민족이 다시 집권한 명대(明代:1368~1644)의 회화는 쑤저우(蘇州)를 중심으로 심주(沈周)와 그의 영향을 받은 문징명(文徵明)·구영(仇英) 등의 문인화가들에 의한 오파가 남종화의 세계를 개척하고, 항저우(杭州) 출생의 대진(戴進)을 시조로 거칠고 자유분방한 필묵과 화면의 율동이 두드러진 이성(李成)·곽희(郭熙) 등의 절파 양식이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후대에 남종화가 우세해지며, 절파는 광태사학(狂態邪學)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청대(淸代:1636~1912)의 회화는 국력이 전성기에 달한 강희(康熙)·건륭(乾隆)년간을 정점으로 오파 화풍의 다양한 경향이 끝나던 전기와 이른바 양저우화파(揚州畵派)의 성립 및 전개과정이 이뤄지던 후기로 나뉜다. 명대의 문인사대부의 맥이 단절되고, 만주족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못한 유민화가들의 등장과 함께 개성적인 작업이 전개된다. 그 중 주탑(朱A)은 동기창(董其昌) 이후의 새로운 화풍과 서위(徐謂)의 격렬한 필법을 이어받아 내면세계를 매우 격앙된 화풍으로 표현하였으며, 석도(石濤)는 강남지방을 편력하며 자연에 대한 시적 감흥을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화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후 건륭년간에 장쑤성[江蘇省]의 상업도시 양저우의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문인취미가 풍부한 이른바 양주팔괴(揚州八怪) 등의 개성적인 화가들이 나타났으며, 참신하면서도 파격적인 이들의 화풍은 ‘태평천국의 난’ 이후 화단의 중심이 되어 우창숴[吳昌碩]와 같은 상하이[上海]파를 비롯 현대의 치바이스[齊白石], 쉬베이훙[徐悲鴻] 등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회화의 역사】

 〈고대〉

 한국 회화는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울산시 울주구 반구대의 암각화를 그 시원으로 하며, 삼국시대에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회화의 발달을 보여준다. 특히 고구려 회화의 찬란한 발달은 만주와 평양을 중심으로 분포된 고분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려진 대상이나 주제에 따라 시대적 변천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안악 3호분, 덕흥리고분을 비롯 퉁거우[通溝] 무용총과 각저총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의 고분벽화가 묘지 주인의 초상을 중심으로 풍속화적 요소와 불교적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는 활력 넘치는 화풍과 생생한 인물묘사가 두드러지며, 6세기 말과 7세기 초반의 사신총, 강서대묘, 진파리 고분군 등의 후기 고분벽화에는 사신도가 주로 그려져 있다. 백제 회화는 그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고구려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이면서 높은 수준의 회화세계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백제회화는 송산리 6호분의 사신도와 능산리고분의 사신도 및 연화문, 그리고 무령왕릉의 어룡(魚龍)과 신수(神獸) 문양 정도이며, 역동적인 고구려 벽화에 비해 박진감은 떨어지나 유려하고 부드러운 선과 안정된 공간구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점은 7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산수문전(山水文塼)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비록 부조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백제 산수화의 품격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일본을 건너간 아좌태자(阿佐太子)의 《성덕태자상》은 백제 인물화의 발달상을 보여준다.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돌무지덧널무덤이 고분구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라는 상대적으로 회화자료가 빈약하지만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와 《기마인물도》 《서조도(瑞鳥圖)》를 통해 신라회화의 수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이전에 채전(彩典)을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후에 나타나는 도화원(圖畵院)처럼 화사(畵事)를 관장하는 관청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또한 불국사·석굴암 등과 같은 훌륭한 조형예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다만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다는 솔거(率居)와 같은 화가들의 이름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회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도화원의 직업적인 전문화가인 화원에 의한 그림과 왕공사대부 및 승려들이 즐겨 그림을 그렸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화원인 이령(李寧)이 그린 《예성강도(禮成江圖)》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 등은 현존하지 않지만, 중국 송나라에까지 그의 재능이 알려져 황제가 직접 이령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도록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산수화뿐만 아니라 안향초상(安珦肖像)과 같은 인물초상화를 비롯 영모·화조·누각·사군자 등과 기록화적인 성격이 강한 기로회도(耆老會圖) 등이 그려졌으며, 불화 또한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현존하는 고려의 회화로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와 이제현(李齊賢)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노영(魯英)의 《지장보살도》 등이 있으며, 벽화로는 거창 둔마리 고분의 《주악천녀도(奏樂天女圖)》가 전해진다.

<조선왕조>

 조선시대(1392~1910)는 한국 미술 역사상 회화가 가장 발달한 때로서 도화서를 통해 배출된 뛰어난 화원들과 사대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조선 전기 회화의 정립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통해 회화의 경지를 끌어올린 안견(安堅)을 비롯 사대부 출신으로 절파화풍을 수용한 강희안(姜希顔), 안평대군, 천민 출신으로 남송 원체화풍을 받아들여 뛰어난 회화적 경지를 발판으로 신분상승한 이상좌(李上佐), 종실 출신으로 영모화에 능했던 이암(李巖) 등에 의해 이뤄졌으며, 그 밖에 이장손(李長孫)·최숙창(崔叔昌)과 같은 화가는 미법산수(米法山水)의 세계를 보여준다. 왜란과 호란 등의 전란에 의해 전국토가 유린당한 조선 중기에도 안견화풍이 계승되었으며, 한편으로 강희안에 의해 시험된 절파화풍이 확산되었다. 즉, 이상좌의 아들 이숭효(李崇孝)는 절파화풍의 인물화와 영모화를 잘 그렸으나 요절하였고, 그의 아들 이정(李楨) 역시 가계를 계승하여 안견화풍과 절파화풍이 결합된 경향의 산수화를 남겼다. 조선 중기의 가장 개성적인 화가를 들자면 김명국(金明國)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그림은 광태사학적 호방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달마도(達磨圖)》에서 볼 수 있듯이 선화(禪畵)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이 시대에 김제(金)와 김식(金埴)은 소그림을 잘 그렸으며, 김제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절파화풍의 정착에 영향을 미친 이경윤(李慶胤)은 산수인물화에, 그리고 조속(趙涑)과 조지운(趙之耘) 부자는 수묵화조에 뛰어났다. 조선회화는 명·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민족적인 색채를 띠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발전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특히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삼절(三絶)로서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삼재(三齋)로 불려진다. 영정조 시대에 민족 자아의식의 발현을 토대로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키던 실학의 발흥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비롯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등의 풍속화도 영향을 미쳤으나, 조선 후기 회화는 절파화풍이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중국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어 김두량(金斗樑)·박제가(朴齊家) 등의 18세기 화가들에 의해 수용된 서양화법은, 그 후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거리 그림에도 반영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진경화법이 쇠퇴하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풍이 세력을 굳힌다. 김정희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조희룡(趙熙龍)·허련(許鍊)·전기(田琦) 등의 이른바 추사파와 남종화풍을 토대로 서구적 화풍을 수용한 윤제홍(尹濟弘)·김수철(金秀哲) 등의 작품이 주목되지만, 19세기 후반의 정치적 격동과 함께 회화 역시 위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 중 장승업(張承業)은 전통회화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은 조선 후기로부터 근대 회화로 연결되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다.

〈근대〉

 한국에 서양화가 소개된 것은 1899년경 네덜란드계 미국인인 휴버트 보스가 중국을 거쳐 입경하여, 고종과 세자의 어진을 그린 것부터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근대화가들은 주로 일본에서 서구적 기법을 배우고 돌아와 작업을 했기 때문에 모방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1908년 고희동(高羲東)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도쿄[東京]미술학교를 입학한 것을 비롯하여, 김관호(金觀鎬)·김찬영(金瓚永)· 나혜석(羅蕙錫) 등 역시 일본에 유학하였으며, 이종우(李鍾禹)는 도쿄미술학교를 거쳐 프랑스에서, 임용련(任用璉)과 장발(張勃)은 미국에서 현대미술과 접촉하였다. 한편 1911년 3월 조석진과 안중식을 교수로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기관인 경성서화미술원이 설립되어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를 첫 입학생으로 받았으며, 이듬해 김은호(金殷鎬)가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서화미술원은 계속하여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최우석(崔禹錫) 등을 배출하였으나, 19년에 문을 닫았다. 1916년에는 김관호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그해 10월 《해질녁》으로 일본 문전(文展:文部省展覽會)에서 특선으로 입상하였으며, 12월에는 고향인 평양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8년 6월 안중식을 회장으로 서화협회가 발족하였으며, 21년 이후 이 단체가 개최하는 ‘협전’이 36년까지 개최되었다. 민전인 협전에 비해 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1922년부터 실시한 선전(鮮展:朝鮮美術展覽會)은 관전으로 44년까지 열렸다. 1930년대에는 김환기(金煥基)· 유영국(劉永國) 등에 의해 추상회화가 그려지기도 하였으나, 40년대 일제의 전시체제 돌입에 따라 많은 미술가들이 친일세력으로 변절하거나 절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