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渤海)시대
발해(渤海)시대
<발해 돌사자상>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있던 발해(698~926년)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王姓)인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전하는 발해국서(渤海國書: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 또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天孫)’을 일컫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졌던 발해에서도 회화, 조각, 공예, 건축등 다방면의 미술이 발전했다. 발해 시대의 지상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유적의 발굴로 그 웅장함이 확인된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의 장안성처럼 먼저 외성을 두르고 국왕이 있는 궁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직선으로 뻗은 주작대로라는 큰 길을 내었으며, 그 좌우에 여러 갈래의 길을 내었다. 발해의 도읍이었던 곳을 중심으로 많은 고분이 남아 있는데, 육정산 고분군은 정혜 공주묘가 , 용두산 고분군은 정효공주 묘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북한 지역의 발해 유적은 1980년대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다. 중국 지역의 발해 유적 발굴이 힘들어지자, 북한 지역으로 눈을 돌렸고 북청을 중심으로 함경도 지역에서 발해 유적.유물을 발굴, 남경 남해부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고고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북청군의 북청 토성,김책시에 있는 성산리 토성과 같은 평지성과 차단성,절터,고분군 봉수대,주거지 등이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유적은 동해안 해안가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대동강이나 평양성 근처에는 아직 발해 유적이 전무하다. 북한은 동경용원부의 팔련성설을 부정하면서 부거석성을 동경용원부로 비정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는 발해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연해주 지역은 발해를 이은 금나라 멸망 후, 19세기 러시아가 들어올 때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발해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러시아 학자들의 노력으로 수 많은 성터와,절터,주거지 등이 확인 되었는데 발해의 유적은 해안가와 강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유적은 발해 시대때 동경용원부,솔빈부,안원부의 지역이다. 염주는 일본의 사신이 출발하는 항구 도시이면서 신라와의 경제적인 교류도 가졌던 도시이다. 유적은 솔빈부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발해 시대 명마의 지역으로서 발해군의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정혜공주묘의 벽화, 불상, 와당을 비롯한 각종 공예품들을 통하여 발해의 미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해의 자기는 대체로 무게가 가볍고 광택이 있는데, 그 종류나 크기, 형태, 색깔등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발해의 자기는 같은 시대 여러 나라의 도자기 공예보다 독특하게 발전되었으며, 당에 수출하기도 했다. 발해의 미술은 대체로 고구려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수용하여 그 나름의 미술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으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규명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동모산 : 동모산은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처음 도읍을 정하였다고 하는 돈화시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에 의하면 대조영은 동모산을 근거지로 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20세기에 와서 동모산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였다. 1949년 돈화 부분의 육정산 고분군과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돈화가 발해 초창기의 도읍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돈화시 서남쪽에는 성산자산이 바로 동모산이고, 그곳에 남아 있는 산성이 바로 대조영이 쌓은 성으로 인정되기에 일르렀다. 성산자산은 해발 600m 정도의 비교적 낮은 산으로 평야지대 안에 외따로 솟아 있다. 그 중턱에 있는 산성은 길이가 2km 정도로 돌과 흙으로 쌓았다. 성벽 높이는 1.5-2.5m이고, 밑변의 너비는 5-7m 정도이다. 남쪽 벽에는 망을 보기 위한 치(雉)가 세군데에 남아 있다.223 발해의 5층전탑(영광탑) 높이 13m, 중국 장백 조선족 자치현. 평안북도 혜산진 건너편에는 조선족 자치구인 장백현이 있다. 장백현의 장백진(長白鎭) 교외의 탑산(塔山)에는 영광탑(靈光塔)이라 불리는 발해의 5층전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평면은 4각형이다. 1층 4면 각각에는 왕(王), 립(立), 국(國), 토(土)라는 글자 모양의 벽돌 문양이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불교는 발해 왕실과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4년 탑을 보수할 때에 지하에 지궁(地宮)이라고 하는 무덤 칸이 확인되었다. 이미 도굴된 상태였지만 무덤에는 간단한 벽화를 그리고 사리함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탑은 이미 청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1908년 장봉대(張鳳台)라는 사람이 이 탑을 공자를 모신 노나라 영광전(靈光殿)처럼 오랜 풍상에도 의연하게 남아 있다고 기록하여 영광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해의 정효공주 무덤탑이나 마적달탑 등과 비교된 뒤 1980년대에 와서야 발해시대의 탑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 : 발해(渤海) 문왕(文王:大欽茂)의 둘째 딸 정혜공주(貞惠公主/737~777)의 묘.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 남쪽 5km에 있는 육정산(六頂山)고분군에 있다. 대형의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墳]으로 널방[玄室]과 널길[羨道] 및 묘도(墓道)로 구성되었으며, 모줄임[抹角藻井] 천장이다. 1949년 8월 중국 학자들이 발굴 조사할 때에는 이미 도굴되어 있어 나무널 조각과 돌사자 2점, 도금된 동제(銅製) 원두정(圓頭釘) 4점이 발견되었다. 이때 화강제 묘비도 발견되었는데, 묘비의 발견으로 이 무덤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묘비는 1949년 발굴시에 무덤 안에서 7조각으로 깨진 채 발견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진 규형(圭形)이다. 크기는 높이 90 cm, 너비 49 cm, 두께 29 cm이다. 현재 지린성 창춘(長春)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은 21행 725자로 그 중 491자는 명확하게 판독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1980년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가 발견됨에 따라 모두 보충할 수 있었다. 비문은 전형적인 변려체 문장으로 13행의 서문과 6행의 명문, 마지막 행의 비석을 세운 연월일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비는 정효공주의 것과 함께 발해사의 재구성에 있어 아주 진귀한 사료이다. 이 묘비가 발견됨에 따라 육정산고분군이 발해 초기의 왕실, 귀족들이 매장된 곳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초기 도읍지였던 동모산(東牟山) 지역이 바로 둔화시 일대라는 것이 확정되었다. 또 문헌 기록에는 없는 발해 문왕 때의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 즉 문왕의 존호(尊號)와 연호(年號) 등을 알 수 있었는데, 특히 존호에 ‘금륜성법(金輪聖法)’을 덧붙인 것은 무왕이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을 군주의 이상상(理想像)으로 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 비문(碑文)에 의하면 공주는 3년장으로 치러졌는데, 이는 고구려의 3년장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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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 전탑(영광탑) 높이 13m, 중국 장백 조선족 자치현 소재. 평안북도 혜산진 건너편에는 조선족 자치구인 장백현이 있다. 장백현의 장백진(長白鎭) 교외의 탑산(塔山)에는 영광탑(靈光塔)이라 불리는 발해의 5층전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평면은 4각형이다. 1층 4면 각각에는 왕(王), 립(立), 국(國), 토(土)라는 글자 모양의 벽돌 문양이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불교는 발해 왕실과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4년 탑을 보수할 때에 지하에 지궁(地宮)이라고 하는 무덤 칸이 확인되었다. 이미 도굴된 상태였지만 무덤에는 간단한 벽화를 그리고 사리함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탑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한 발해를 찾아서의 저자 송기호 교수는 우리 나라 안동 지역 등에 남아 있는 전탑들이 발해와 교류하였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하였다. 이 탑은 이미 청대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1908년 장봉대(張鳳台)라는 사람이 이 탑을 공자를 모신 노나라 영광전(靈光殿)처럼 오랜 풍상에도 의연하게 남아 있다고 기록하여 영광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해의 정효공주 무덤탑이나 마적달탑 등과 비교된 뒤 1980년대에 와서야 발해시대의 탑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 모사도 일찌기 발해 3대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의 묘가 발굴되었었는데, 1980년대에 이르러 그 동생인 정효공주의 무덤이 묘비와 함께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현 용두산에서 발굴되었다. 정혜공주묘와 화룡현 하남둔 고분 등에서 벽화 잔편이 발견된바 있으나, 완전한 벽화가 발견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이 벽화는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그 위에 열두 사람의 인물을 채색으로 묘사했는데, 인물의 윤곽을 스케치하는 방법만 다를 뿐 모든 회화기법은 고구려의 프레스코 전통 화법에 이어지고 있다. 무덤은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졌는데 벽화는 안길의 뒷부분과 안칸의 동, 서,북쪽의 벽에 그려져 있다. 벽화는 처음에 예리한 긁개같은 것으로 윤곽을 표시한 다음, 적 청 녹, 흑, 백색 등 여러가지 색깔을 고르게 입히고 다시 먹선으로 윤곽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방법을 썼다. 이것은 고구려 수산리 벽화무덤 등 고구려 벽화에서 발휘된 전통적인 화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무기를 든 인물들 외에 악기를 든 인물들이 있어 발해에서 음악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고, 발해인들의 풍속도 시사받는 점이 있다. 이외에 수준높은 2개의 돌사자(51cm)와 비석도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이미 발견된 정혜공주의 비문과 거의 일치하는 문장형식인데, 화려한 문구를 총동원하고 있으며, 당시의 한문학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의복 등은 고구려와 다르나(당의 영향) 기법에서는 그대로 고구려의 화풍을 엿볼 수 있는 8세기 경의 작품이다.
상경 제1절터 석등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상경 제1절터에서 나온 석등이다. 이 석등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6m의 거대한 석등으로 기대석, 중대석, 입석, 상륜 등으로 이루어졌다. 중대석과 기대석의 절반부분에는 아래위로 서로 마주 바라보게 연꽃을 장식하였다. 연꽃 무늬는 강하고 힘찬데 이는 고구려 미술의 특징과 비슷하다.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그 모서리마다 주춧돌과 기둥 및 주두를 정교하게 조각하여 그 위에 팔각지붕을 이었다. 이것은 팔각정자와 그 모습이 거의 비슷한데 상경 궁전 정원의 팔각정자를 돌로 조각한 듯한 느낌을 준다. 구도에서 안정감을 보이면서 균형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구름모양 지배기 발해는 자기, 기와, 벽돌 등의 공예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특히 도자기에서 뛰어나 외국에 수출하였다. 당의 고금도서집성에는 `자색 자기인 자배기는 크기가 반섬이나 되며 안팎이 투명한 순자색이고 두께는 한치가 넘지만, 그 무게는 새털과 같이 가볍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의 도자공들은 그릇의 전 표면에 걸쳐 황, 갈, 녹, 자색과 같은 단색 사기물을 입히기도 했지만, 두 색 또는 세가지 색을 한꺼번에 발라 자연스럽게 아롱지는 효과를 내는 삼채 수법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삼채 기법은 막새기와, 장식벽돌, 치미와 귀면 등 건축 장식에도 사용되었다.
귀면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약 8cm 크기의 것이다. 그 생김새로 미루어 어떤 그릇 밑에 달렸던 다리임이 분명하다. 길게 내민 혀를 땅에 대고 머리로 그릇의 몸체를 떠받게 만든 것이다. 생동감있게 표현되었다.
치미 상경의 동경성 안의 제1절터에서 출토된 이 치미는 사찰건축에 사용된 것이다. 녹유 치미로 앞서 구름모양자배기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삼채기법을 사용하여 구운 것이다.
순금제 허리띠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현 팔가자 제2호 묘에서 출토된 금제 대구이다. 네모진 금판에 정교하게 꽃무늬를 새기고 그 안에 옥을 상감하였다. 발해 금속세공 기술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불상 동경성에서는 앞서의 석등 외에도 돌사자, 불상 등이 발굴되었다. 그 중 숫적으로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이 불상인데 수십편이 발굴되었다. 그 외에 성마다 많은 절터가 발견됨으로써 발해 역시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였음이 밝혀졌다.
소조연화문 상륜1994년 크라스키노 발해 유적 에서 발굴된 소조연화문 상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