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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고구려 고분_高句麗 古墳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18.

 

고구려 고분(高句麗 古墳)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의 일부

 

 

 압록강 대안인 통구 일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 일대, 황해도 안악 지방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 무덤들은 대체로 돌을 쌓고 벽면에 곱게 회를 바른 다음 벽화를 그렸는데, 부분적으로는 화강석 혹은 대리석으로 벽을 만들고 돌로 된 벽면에 직접 그린 것들도 있다. 벽화는 무덤의 복도(연도), 문, 벽, 천장 등 여러 곳에 그려져 있는데 천장에는 주로 해, 달, 별, 성좌 등 천체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연꽃무늬 등을 그리고 도리, 벽 부분에는 여러 가지 무늬, 생활 풍속과 가상적인 동물-방위신인 사신 등을 그렸으며 복도문 어귀에는 수호신 등을 그리기도 하였다. 고구려 지배층은 영혼 불멸을 믿었고 살아서의 영광을 죽어서도 지속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 그림들 속에는 고구려 지배층의 생활 외에도 민중의 삶의 모습이 배어 있는 경우가 많아 당시의 생활을 반영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물을 그릴 때에도 주인공 귀족은 매우 크게, 시종들은 매우 작게 그리는 등 신분상의 격차를 반영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1.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것, 2. 생활 풍속과 사신도를 곁들인 것, 3. 사신도를 주로 그린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안악 2 3호분, 각저총, 무용총 등이 있고,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쌍영총, 대안리 1호분이 있다.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강서대 중 소묘를 들 수 있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그려진 고구려 고분 벽화는 대체로 생활 풍속 위주의 그림에서 사신도 위주의 그림으로 변천하여 갔다. 고구려 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성되었을 터이지만, 초기의 중심지인 압록강 유역과 후기의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지안[集安] 일대에는 수만기의 고구려고분이 곳곳에 널려 있다. 고구려고분은 외형상의 특징에 의해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積石塚]이고, 다른 하나는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다. 양자 중 전자가 먼저 나타난 무덤양식으로서 대략 BC 3∼2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후자는 AD 4세기경에 비로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돌무지무덤에 대해 살펴보면, 주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渾江), 독로강(禿魯江) 유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왔으나 대체로 랴오둥[遼東]반도에 분포하는 고조선시기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축조방식이나 용재(用材)의 차이에 의해 다양한 세부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단(基壇)의 유무를 기준으로 삼아 무기단 돌무지무덤과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대별하고 있으며, 후자는 다시 외형상의 특징을 통해 단순기단식과 계단식으로 구분되고, 또 계단식의 경우 내부 매장주체시설의 차이에 따라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돌방무덤[石室墓]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무덤양식들은 돌무지무덤의 시기적인 변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같은 시기에 있어서는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은 강가의 모래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 뒤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냇돌을 덮은 간단한 형식의 것으로, 고구려 국가의 성립 이전인 BC 3세기경부터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넙적한 판석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인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AD 1∼2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파악되며, 강가뿐만 아니라 산기슭에도 만들어져 있고, 이에 따라 무덤축조의 재료로서 냇돌 외에 모난 산돌도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3∼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 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 겹의 돌로 덮은 것이다. 이로 인해 무덤의 테두리를 이루는 기단 즉 첫째단과 덧널의 벽체를 이루는 둘째단, 덧널의 상층부를 이루는 셋째단이 외형상 계단 모양을 취하게 된다. 장군총과 같은 초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계단의 숫자가 3단이 아니라 7단까지 이르기도 하며, 이 경우 시체가 묻히는 장소는 둘째단이 아니라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다. 내부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거의 대부분이 매장주체부를 지하나 지면에 바로 두지 않고 돌무지부 중에 마련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매장주체시설로는 흔히 돌덧널[石槨]이 설치되는데, 원래는 시체를 위로부터 묻는 구덩식[穴式]이 기본이었으나,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굴식[橫穴式]에서 볼 수 있는 널길[羨道]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며, 장군총이나 태왕묘(太王墓) 등의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실제로 연도가 딸린 굴식의 돌방이 조성되어 있다. 한편 축조 재료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주로 냇돌이나 산돌 등의 막돌을 이용한 것이 많았지만,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정성들여 다듬은 절석(切石)을 사용한 것이 출현한다. 이러한 절석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무덤축조에 들인 공력의 측면에서 다른 무덤양식을 압도하며 장군총의 예에서 보듯이 초대형인 경우가 많아, 대체로 왕이나 최고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다양한 무덤양식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돌무지무덤 축조방식의 발전과 분화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무덤양식에도 엄격하게 가해지는 모습, 즉 고구려 사회내의 계층분화가 심화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봉토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 평양지역에서 먼저 출현하였으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지안지역과 평양지역을 가릴 것 없이 고구려 지배층의 주된 묘제가 된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무덤양식이다. 봉토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주체시설로서 지상이나 반지하에 연도가 딸린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이 아닌 흙을 덮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축조방식은 재래의 돌무지무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봉토무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북한학계의 경우 돌무지무덤으로부터 자체 발전하였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 있으나, 자체 발전으로만 보기에는 묘제의 변화상이 너무 심해, 랴오둥지방의 중국 한(漢)나라 돌방무덤이나 낙랑의 벽돌무덤의 영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4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악하에 있던 평양 부근에서 안악(安岳) 3호분과 같이 중국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벽화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축조되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봉토무덤은 4세기 이후 1세기 이상 돌무지무덤과 공존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다양한 무덤양식을 파생시키는데, 예컨대 재래의 돌무지무덤에서와 같이 돌로 기단을 두른 후 흙으로 덮은 봉토돌방무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봉토무덤처럼 돌방을 지상에 설치하고 돌을 덮은 돌무지무덤, 즉 소위 봉석돌방무덤[封石石室墓]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완전한 봉토가 아닌 토석혼봉(土石混封)의 돌방무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묘제상의 혼효는 봉토돌방무덤의 아이디어가 고구려 사회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봉토돌방무덤 일색이 되고 만다. 봉토무덤은 규모의 대소, 널방[墓室]의 숫자, 널방의 축조재료, 널방천장의 조성방식, 벽화의 유무 등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봉토무덤의 발전과정도 나타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장자의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서술의 편의상 소형분과 대형분으로 대별하여 양자의 특색을 살펴보면, 먼저 소형분의 경우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평면을 가진 외방[單室]을 반지하에 설치한 것이 대부분인데, 흔히 할석(割石)이나 괴석(塊石)을 여러 겹 포개쌓거나 다듬지 않은 거친 판석을 세워 벽면을 조성하였다. 천장조성방식으로는 널방 상부에 1장 또는 수 장의 큰 판석을 그냥 얹어놓는 평천장식이 많이 쓰였고, 벽화와 같은 내부장식은 거의 없다. 한편 대형분은 널방을 대규모의 외방으로 조성한 것이 많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것 중에는 전후 2방 구조 혹은 앞방[前室] 좌우에 옆방[側室]이 붙는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있고, 3방구조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널방의 벽면은 할석 등을 쌓은 후 회를 발라 다듬거나, 곱게 간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였으며, 여기에 벽화를 그려 장식한 경우가 많다. 옆방의 천장은 평천장도 많지만, 벽면이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 천장의 폭이 좁혀지는 궁륭식 천장과 네 벽의 상부 중앙에서 이웃한 벽의 상부 중앙으로 연결되는 삼각형의 평면 공간을 커다란 판석 등으로 덮어 네 모서리를 계속 줄여나가는 모줄임[抹角藻井]천장 등도 유행하였다. 또 대형분에는 널방 내에 널받침[棺臺]이 갖추어진 것이 상당수 있고, 널방 바닥에 배수시설이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왕릉급의 초대형분의 경우 무덤 둘레에 잘 다듬은 돌을 깔아 묘역을 조성한 것들도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고분의 변천과정을 개관하였는데, 총괄해 볼 때 고구려고분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돌무지무덤과 봉토무덤을 막론하고 외형상 사각방대형(四角方臺形) 혹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을 취한다는 점인데, 이는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나 가야의 구덩식 돌덧널무덤[穴式石槨墳]이 대부분 원형의 봉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크게 차이나는 것이다. 그리고 매장주체부가 대부분 지상에 위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돌덧널이나 돌방이 고분의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돌무지무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제외하고는 매장주체시설이 대부분 땅을 파고 지하에 마련된다. 이러한 특색과 함께 고구려고분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벽화를 그린 무덤이 대단히 많다는 점이다.  [지안현 지역 고구려 고분군]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분은 90여 기에 이르는데, 평양 일원에서 65기, 지안 일대에서 23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돌무지무덤인 지안 우산하(禹山下) 41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봉토돌방무덤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에서의 벽화분의 출현은 대략 4세기 무렵임을 추측 할 수 있으며, 아울러 벽화의 아이디어는 봉토무덤의 아이디어와 함께 랴오둥 지방의 벽화가 그려진 중국 돌방무덤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벽화의 내용은 시기별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초기에는 묘주(墓主)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행렬도·배례도(拜禮圖) 등 그의 생전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4세기 후반의 안악 3호분, 5세기 초의 덕흥리(德興里)고분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여기에는 사후에도 생전에서와 같은 부귀와 영화를 계속 누리기를 염원하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5세기 이후 고구려 지배층에 불교가 파급됨에 따라서 불교적 내세관이 벽화에도 나타났는데,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연화화생도(蓮華化生圖)나 예불도(禮佛圖)가 인물풍속도와 함께 그려지거나 아예 인물풍속도 없이 연꽃무늬만이 사방에 그려지기도 하였다. 5세기 전반의 무용총, 5세기 중엽의 장천(長川) 1호분, 산연화총(散蓮華塚)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도교사상의 확산으로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그려진 사신도(四神圖)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진파리 1호분 청룡도]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1호분, 지안 사신총(四神塚)을 비롯한 많은 고구려 후기의 봉토무덤이 사신도를 벽화의 주제로 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이처럼 고구려 사회의 사상적 변화상이 잘 표현되어 있어, 문헌사료가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에 귀중한 연구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벽화무덤은 남쪽의 백제·신라·가야에도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서 공주의 송산리(宋山里) 6호분이나 부여의 능산리(陵山里) 1호분, 순흥 어숙지술간묘(於宿知述干墓) 및 읍내리(邑內里) 벽화고분, 고령 고아동(古衙洞) 벽화고분 등에서도 연화문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 본 사회생활의 변천.

1). 문화의 변천
삼국 중에서 특히 고구려에만 고분 벽화가 많다. 이것은 무덤의 형식에 의한 것이다. 고구려는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돌로 현실을 만들고 현실의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무덤은 거의 돌무지 무덤(적석총)으로 벽화를 그릴 곳이 없었다.
전기와 중기의 벽화에는 가무와 수렵 장면이 많으며 특히 중기 벽화에서는 창고와 갑옷, 투구, 무기 그림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4세기 이후 광개토대왕 시대 때 영토 확장으로 물자가 풍부해지고 잉여 생산물이 생겼기 떄문이다.
그러나 후기에는 수렵 장면이 드물다. 이것은 수렵이 농업 생산의 부족을 메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고구려 중기 이후 농업의 계속적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산수화의 발전 과정.
중기 무용총의 수렵도와 각저총의 씨름도에서는 손바닥 위에 주먹밥을 올려 놓은 듯한 나무와 굴곡의 파상선으로 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나,후기 진파리 1호 분묘의 산악도에서는 최초로 표현된 산의 주름을 볼 수 있으며 수목 현무도에서는 소나무 줄기와 가지의 곡선 등, 여태까지는 볼 수 없었던 가장 세련된 기법을 감상할 수 있다.

3). 사회 형태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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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 형태
노예 사회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주인의 옆에 남녀 하인들이 서 있고 때로는 무릎을 꿇고 있다. 또 주인과 하인의 크기를 다르게 해서 그렸다.

(2). 어로와 수렵.
수렵도가 많다. 집안(集安) 벽화 속의 36.8%가 수렵도이다. 이것으로 수렵이 고구려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음을 알 수 있다.

(3). 농업.
각저총과 무용총에서 소가 마차를 끄는 장면이 있는데 우경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선구 1호 분에는 높고 큰 창고(부경)가 있는데 당시 양식 저장량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동시에 이것은 귀족 소유의 창고임을 알려 주는데 일반 농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기 떄문이다.

(4). 수공업 : 농업 생산에서 발전 했음을 알 수 있다.
①. 건축: 고성, 궁전, 주택 그림이 많다. 대부분 귀족 주택이며 정자, 주방, 마굿간 등의 부속 건물이 딸려 있다.
②. 야금술: 야금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철촉, 금장식, 도금 마구 등으로 뛰어난 자치적 야금술과 금속 제조업 기술을 가졌었음을 알 수 있다.
③. 토기 제작: 각저총, 무용총, 삼실묘의 벽화에 그려진 그릇의 색깔과 조형으로 질그릇임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천민의 일이므로 벽화로는 남지 않았다.
④.목제품: 목가구가 많고 나무 침상과 나무 마차 바퀴도 있다.
⑤. 방직: 긴치마, 꽃무늬 저고리, 긴 바지 등이 있고 다채로운 문양이 있다.

덕흥리고분 견우와 직녀  덕흥리 고분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무덤을 죽어서 사는 공간으로 인식했다. 또 무덤의 벽과 평면은 땅으로, 천정은 하늘로 생각하여 벽에는 생전의 사는 모습을, 천정에는 천상세계를 그렸다. 그래서 죽어서 천상세계에 가려면 은하수를 건너야 하고 그러자면 견우와 직녀를 만난다고 생각했다. 이 신화는 농경사회의 일반적인 것으로 고구려의 특수한 것은 아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고삐를 쥐고 소를 끄는 견우상, 그 뒤쪽에는 개를 데리고 서있는 직녀상이 그려져 있다. 견우지상, 직녀지상이라는 먹글이 씌여져 있다. 견우의 약간 일그러진 얼굴도 재미있고, 소의 얼굴이라든가 걸음걸이에 애교가 있어 해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덕흥리고분 묘주도 및 13태수 하례도 덕흥리 고분은 안악 3호분(동수묘) 다음으로 연대가 확실한 고분이다. 평양 서북방 대안시 덕흥리에 있다. 묵서명에 의해 오늘의 북경 지방인 신도현 출신으로 유주자사를 지냈고 불교신도이며 고구려에 와서 국소대형의 관작을 받고 호태왕(好太王) 영락(永樂) 18년(408)에 별세한 사람의 무덤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고분의 경우도 벽화의 내용은 안악 3호분과 같으나 견우직녀, 수렵도 등이 있다. 이 사진은 주인공에게 그 예하의 13군 태수가 하례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화려한 장방 안 평상 위에 평좌를 틀고 앉아 있다.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갈색의 맞섶 겉옷에 넓은 검은 띠를 맸으며 오른손에는 검은 털 부채를 쥐고 왼손은 띠 앞까지 올리고 있다. 겉옷 밑에는 담녹색 옷을 입은 것이 보인다. 얼굴은 넓고 둥그스름하고 길고 진한 눈썹은 약간 높으며 가느다란 눈매에 약간 긴 콧등, 그리고 팔자형 수염을 잘 다듬고 턱수염을 길러 위풍당당한 풍모를 하고 있다.

수산리고분 교예도 중앙에서 왼쪽에는 시종이 받쳐든 대가 굽은 박쥐 모양의 검은 양산 밑에 서서 교예를 구경하는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검은색 관을 쓰고 깃, 끝동, 단에 검은 선을 붙인 누런 겉옷을 입었으며 팔자 수염, 턱수염을 기른 둥근 얼굴에 미소를 짓고 교예를 구경하고 있다. 그런 주인공 바로 뒤에는 시종이 양산을 받쳐들고 있으며 그 뒤에는 검은 긴 저고리에 점무늬 바지를 입은 시녀가 뒤에서 받쳐든 검은 양산 밑에 서서 얼굴에 역시 미소를 지으면서 구경하는 주인공 부인이 그려있다. 부인은 큰 머리를 하고 풍만한 둥근 얼굴에 붉은 점을 찍어서 화장을 하였으며, 옷깃, 도련, 소매 끝에 무늬를 수놓은 붉은 선을 단 검은 긴 저고리를 입고 그 밑에 색동치마를 입고 있다.

수산리고분 주인과 하녀 수산리 고분은 섬세하고 우수한 회화기법으로 유명하다. 평남 강서군 수산면 수산리에 위치하며 남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현실 서벽 윗단에 주인공 부부가 시종, 시녀를 거느리고 교예를 구경하고 있다. 교예도는 제한된 화면에서 많은 장면을 보여주기 위하여 위에는 긴 나무에서 다리 재주를 부리는 사람을 그렸고 그 밑에 다섯개의 둥근 고리와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3개의 막대기를 엇바꾸어 던지는 사람들을 그렸다. 주인공이 미소짓고 흥겹게 구경하는 장면이나 세 교예사가 열심히 곡예하는 자태 그 모두가 움직이는 듯이 표현되고 있다. 교예를 부리는 사람이 시종과 같은 크기로 그려진 것을 보니 그들의 신분을 알 만하다.

강서대묘 현무도 우리 나라 고분 벽화에 사신도가 그려진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힘차고 생동감을 주며 세련된 것으로 강서대묘의 것을 꼽는다(평남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 소재). 벽화는 돌벽에 직접 그렸는데, 현실의 남벽 입구 둘레에는 인동 초롱 무늬를 장식했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봉황을 그려 주작을 나타냈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를 그렸다. 사신 신앙은 대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 비롯되며, 한대에 와서는 군진의 방위와 기치에 이용했다가 점차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한대의 거울과 기와류에 사신이 조각되었다. 그러나 사신사상이 가장 적극적으로 신앙된 것은 고구려에서이다. 특히 고구려 후기의 고분 벽화는 사신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 현무는 둥근 원으로 능숙하게 그렸는데 달리는 거북의 몸뚱이를 뱀이 미끄러질 듯이 가볍게 감고 있고 거북은 머리를 뒤로 돌려 등 위에서 뱀과 마주보고 서로 물려고 하고 있다. 부드럽고 율동적인 선조로 처리하였으나 오히려 힘차게 보이니 비록 야생동물적인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몇 배나 더 용맹스러우며 신령스러워 보인다.

강서중묘 현무도 주작(朱雀)은 두 날개를 부채 모양같이 펼치고 입에는 빨간 둥근 구슬(여의주)를 물었으며, 갈색, 붉은 색, 연한 갈색으로 채색된 긴 꼬리를 힘있게 위로 올렸다. 특히 힘있는 가는먹선으로 섬세하게 그린 몸털은 실물을 방불케 하며 돌벽에 그린 것이 아니라 원숙한 솜씨로 종이나 비단에 그린 것같은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고 살아 있는 듯하다.

사신총북벽 현무도 고구려 전성기의 기운찬 모습의 현무도이다. 사신총은 통구에 있는 석실무덤으로 분구의 밑변 한변이 27m, 높이 8m의 고분이다. 이 현무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현무도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는 그림이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거북과 뱀의 모습을 섬세한 선으로 매우 실감 있게 그렸다. 색의 배합이 매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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