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Realism)리얼리즘의 개념
시각에 의존한 정확한 접근 방식과 새로운 관심의 표현인 리얼리즘을 보통 사실주의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리얼리즘의 뜻 속에는 객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베낀다는 의미보다 현실주의, 실재주의란 의미가 더 크게 작용하므로 리얼리즘이란 원래 용어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리얼리즘의 경향은 카라밧지오,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미술사에서는 통상 19세기 프랑스에서 나타난 한 경향을 일컫는다. 나아가 현대예술에 있어서 리얼리즘이란 용어 앞에 ''사회적'', ''사회주의적'', ''비판적'', ''마술적'' , ''극''(hyper) 등의 수식어가 붙는 경우 그 의미가 약간씩 달라지므로 리얼리즘을 정의하는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리얼리즘의 형성배경과 특징
19세기 중반경 프랑스 회화에서 과거 거장들의 기법을 추종하여 매끈하게 그리는 살롱의 정통양식에 대한 반발과, 특히 낭만주의 풍경화의 극단적인 환상과 자연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각에 대한 반작용으로 리얼리즘이 나타났다. 현실의 진상을 정확하게 관찰하여 표현하고자 한 리얼리즘이 나타난 사회적 배경으로 혁명에 의해 성장한 시민의식과 함께 19세기에 나타난 콩트의 실증주의적 관점과 마르크스, 앵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에 따른 과학적 태도의 성장을 들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와 풍자화가이자 판화가이며, 현실비판적 시각과 표현방법 속에 낭만주의적 태도를 간직하고 있던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 프랑스 농촌의 일상을 차분하게 그려낸 미예 Jean Francois Millet (1814-1875), 그리고 인상주의자들의 지도자이기도 한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등을 들 수 있다. 리얼리즘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지도자였던 앵그르와 쿠르베 사이에서 있었던 유명한 ''천사논쟁''과 쿠르베에게 수업받기 위해 찾아온 화가지망생이 그린 예수상 대신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더 정직하다고 말한 그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감각기관을 통해 확인하지 않은 것은 믿지도 그리지도 않겠다는 쿠르베의 실증주의는 그를 미술계의 토마스와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1855년 쿠르베가 출품한 12점의 작품 중에서 3점만 입선하고 작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오르낭의 매장>과 <작업실-나의 예술생활 7년간의 알레고리> 등이 낙선하자 모든 작품을 철수하여 임시전시장을 만들어 리얼리즘관(Pavillon du Realisme)이라 이름 붙이고 40여점의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리얼리즘은 쿠르베의 이름과 동의어가 되었다. 쿠르베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직접 만든 개인전 서문에 그가 썼던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여러 실상을 자기가 본대로 그린다"는 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 관점에 따라 그는 <돌깨는 사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동자의 현실을 정직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자기 작품에 대해 스스로 발언하며, 자기의 의지에 따라 개인전을 개최했다는 점에서 쿠르베의 전위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품인 <작업실>은 전통적인 기독교미술인 삼면제단화처럼 세 개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시 사회의 세 계층을 나타낸 것이었다. 왼쪽에는 상인, 노동자, 그의 아내, 사냥꾼, 노인 등 소외받는 계층의 사람들이, 오른 쪽에는 쿠르베의 지지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샹플레리, 사회주의 철학자 프루동,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보들레르 등 화가의 친구들이 자리잡고 있는 예술과 살롱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화면의 가운데에는 쿠르베와 그의 모델, 어린이를 포함하여 화가의 영역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이 난해하게 보이는 것은 작품 속에 담긴 복잡한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누드 모델이 서 있는데 정작 화가 자신은 풍경화를 그리고 있으며, 아이는 화가의 작업모습을 호기심과 경이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이젤의 왼쪽 밑을 보면 어머니와 수유하는 아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바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요람기 즉, 인생의 시작을 의미한다. 작은 소년은 그 다음단계인 유년시대를, 그 다음에 이젤 위에 놓인 풍경화와 화가, 젊은 모델은 성년기를 나타내는 동시에 이 그림의 초점이 된다. 캔버스 뒤에 있는 ㅅ헝 세바스챤의 모습은 생명의 단계를 완성하며, 그의 발 끝에 있는 해골은 이 성인을 화면의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장의사와 연결시키고 있다.
귀스타브 쿠르베, <작업실-나의 예술생활 7년에 대한 실제적인 알레고리>, 1854-55 쿠르베의 리얼리즘을 확고하게 보여주는 <오르낭의 매장>을 엘 그레코가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과 비교해 보면 두 작품 사이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은 죽음을 모든 것의 사멸로 보지 않고 현실과 천상의 세계가 한 화면 속에 공존하지만 쿠르베의 작품에서 천상의 세계는 더 이상 나타나고 있지 않으며, 장례식은 어느 마을에서나 일어나는 가장 일상적인 사건으로만 취급되고 있다. 게다가 장례식에 모인 인물들을 일렬로 도열시킴으로써 죽음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쿠르베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 1830년 7월 혁명으로 등장한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을 비판한 석판화를 당시 대중적인 풍자잡지인 『카리카튀르』에 발표하자 루이 필립왕으로부터 고발당해 6개월간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던 도미에는 출감 이후 <입법부의 속셈>과 <트랭스노냉 가의 4월 14일>이란 석판화를 발표했다.
그 외에도 파리의 시민생활, 유랑극단, 법정풍경, 삼등객차의 모습 등을 소재로 많은 풍자화와 현실을 반영한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몰리에르의 연극으로부터 인물의 전형을 빌어와 어두운 지역에서 음험한 밀담을 나누는 두 인물을 표현한 작품은 위선적인 인간의 모습에 대한 도미에의 풍자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혁명기의 사회상과 생활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솔직하게 그려냄으로써 그는 리얼리즘의 폭을 더욱 심화시키는데 공헌하였다. 판화, 유화뿐만 아니라 조소에도 재능을 보여 국민의회 의원들을 풍자한 초상조각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예찬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라타포엘>이란 인물조각을 남기기도 했다. 노르망디 그레빌 근교의 농가에서 태어난 미예는 1837년 파리로 가서 들라로슈에게 사사받았다. 이후 로코코 풍의 우아한 파스텔화와 간판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한편 1844년부터 농민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살롱에 출품하였다. 1849년부터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농민의 일상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에 특징적인 단순한 형체의 구성은 르냉 형제와 샤르댕을 잇는 프랑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며, 농부와 같은 하층계층을 기념비적으로 그려낸 것은 도미에와 쿠르베의 리얼리즘 정신과 연결되고 있다. 밀레의 낭만적 특징이 강한 리얼리즘은 화실에서의 제작을 지양하고 야외로 나가 풍경을 사생했던 바르비종의 풍경화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예의 대표작품인 <만종>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그림으로 농촌의 고난한 삶을 이상화시킨 것이긴 하지만, 노동에 대한 경건한 예찬과 소박한 농민들의 삶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보여준다.
출처 : http://plaza1.snut.ac.kr/~ctman 최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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