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Neolithic Age, New Stone Age)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현세에 접어들면서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온 상승으로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는 매우 큰 자연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빙하가 물러나면서 한반도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생태계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기후가 높아짐에 따라 온난대 식물이 자라게 되어 숲이 우거지게 됨에 따라 사는 동물들의 종류도 달라지게 되었다. 빙하기에는 몸집이 큰 동물들이 살고 있었으나 이들은 추운 기후를 따라 이동해 가거나 멸종되고 노루 맷돼지 토끼 등 몸집이 작고 날쌘 동물들이 살게 되었다. 날랜 짐승들의 사냥을 위해서는 좀더 정교하고 기동력 있는 도구가 필요하게 되어 등장한 것이 활이었다. 그리고 점차 정교한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과 같은 깨뜨리는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넓은 돌판에 대고 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간 석기를 이용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짐승을 사냥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서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신석기 사람들은 다양하고 세련된 간석기(마제 석기)를 사용하여 경제생활을 풍부하게 하였다. 돌로 된 가락바퀴와 자연섬유로 만든 그물, 동물뼈로 만든 낚시를 사용하여, 강이나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구석기 시대부터 내려온 사냥기술은 창, 투창, 활 등이 발명됨으로써 훨씬 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식량이 더욱 풍부해졌다. 그리고 이전 같으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짐승들을 이제는 쫓아가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팔은 더 길어졌고 신체는 더 강해졌으며 두뇌는 더욱 발달하였다. 농경도구일람 지탑리 유적에서는 돌보습이 57개나 출토되었고, 다른 유적에서도 돌도끼, 돌괭이, 돌낫, 갈판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농지 경작 방법, 추수 방법, 조리 방법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곧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는 곳에는 이미 다른 식물이 자라고 있으므로 불을 놓아 경작지를 만드는 화전농법이 이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작지에는 돌보습을 이용한 갈이농사도 부분적으로 실시하였다. 돌보습은 돌괭이가 발달하여 만들어졌고 보습날은 나무틀에 매어서 사용하였다. 날을 세우는 장치와 사람이 끌 수 있는 장치가 나무로 만들어지고, 인력에 의한 갈이농사를 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작지를 곰배괭이를 이용해 고른 다음 돌이나 사슴뿔로 된 굴봉이나 괭이를 이용하여 씨를 뿌렸으리라 추정된다. 돌낫, 돌보습 등의 농기구가 불에 탄 곡물이 함께 출토됨으로써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봉산 집탑리, 평양의 남경 유적 등에서 곡물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인들은 수확한 곡식 낟알을 갈돌(갈판)로 갈아서 그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 이전에는 날것으로 먹거나 구워 먹었던 음식을 이제는 토기에 담아 죽처럼 끓여먹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자연상태의 돌을 단순히 깨는 것이 아닌 갈고 다듬어 사용하던 신석기 시대인은 돌만이 아닌 흙으로 새로운 형상을 창조했다. 즉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해안가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한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다. 당시의 주거지의 크기가 거의 비슷하고 출토 유물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 아직 빈부나 계급의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는 혈연에 기초한 씨족이 생활의 기초단위가 되었다. 안정된 식량공급인 채집, 그리고 토기나 옷을 만드는 일들을 비롯하여 종족의 유지와 번식에 결정적 역할인 출산은 여성의 역할이었으므로 이 사회는 여성이 주도하면서 운영되었으나 씨족 성원은 모두 평등한 관계였다. 신석기 시대 말기에 인류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꾼사건이 일어났다. 즉 농경과 목축의 시작이다. 이는 인류를 지금까지와 같은 약탈자가 아닌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는 창조자가 되게 하였다. 신석기인들은 여러가지 예술품들을 남겼는데, 사물을 표현할 때 그 특징만을 강조해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어느 정도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여 실생활과 연관시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을 말해 준다. 이제 신석기시대인들은 무계획적인 자연의 약탈자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여 실생활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물을 보는데 점차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묘사하는 단계를 넘서서 어떠한 특정한 양식을 찾아내고자 했다. 신석기 주거지는 대개 강가나 바닷가에 있어서 구석기 시대와 다른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부산 영도의 동삼동 유적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한 유적이다. 이곳은 여러 개의 문화층이 있는데, 탄소 연대 측정 결과에 의하면 가장 아래층은 BC 3940년이고 한강변의 서울 암사동 유적은 BC 4280, BC 4100년으로 나타났다. 암사동 신석기 유적 복원 상상도 동굴에서 나와 움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4-5명 단위로 기거했는데, 가족이 기본조직인 것은 아니었다. 움집의 생활은 기거와 취사가 중심이었고, 노동을 포함한 사회경제적 생활은 움집 밖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씨족 단위로 모여 살았다. 암사동 유적은 1925년 을축 대홍수에 의해 유적의 일부가 노출되어 세상에 알려졌지만, 196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학술 차원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시대에 사용된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士器]로 양식에 있어서 함북지역과 기타 지역의 2가지로 구분되며, 유사성도 있으나 차이점이 더 많다. 황해안과 남해안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결이 고운 사질토(砂質土)에 활석과 석면을 보강제로 섞었고 무늬에는 대개 사단선무늬[斜單線文]· 어골무늬[魚骨文] 등이 그려져 있다. 이에 대하여 함북지역의 것은 예외없이 밑이 편평하고 점토(粘土)로 바탕흙을 이루었으며, 무늬도 번개무늬[雷文]와 같은 특수한 것이 나타난다. 부산 동삼동(東三洞) 패총에서 빗살무늬토기층 밑에 새로운 토기층이 발굴되었는데, 이 토기는 바닥이 둥근 민무늬[無文]토기로, 원시 민무늬토기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 신석기시대의 주류는 빗살무늬토기이며, 이를 사용한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초기에는 주로 해안이나 강변에서 어로·수렵· 채집으로 생활하였으나, 말기에 이르러 조·피·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게 되는 농경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智塔里) 유적에서 돌가래·돌보습[石犁]·돌낫 등의 농기구와 탄화된 곡물이 발견되어 농경 사실이 입증되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해안과 강변에 거주했던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점차 내륙지방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원형 또는 방형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웅기(雄基)의 패총 움집에서는 오늘날의 화덕과 같은 난방장치도 발견되었다. 한국 신석기문화는 대체로 신석기 B군(群)문화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빗살무늬토기인들의 유입 경로는 대체로 3갈래였으며, 랴오둥[遼東]반도를 분기점으로 황해안지역으로 들어온 경로와 두만강 지역을 통하여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들어온 경로, 그리고 산둥[山東]반도에서 황해안으로 들어온 경로로 짐작된다. 오산리(鰲山里) 하층의 토기는 중국 북동지역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에서도 빗살무늬토기 계통의 신석기문화가 영위되었는데, 이 지역의 토기는 조몬[繩文]토기로 명확한 농경 흔적은 보이지 않고, 유라시아 북부와 관련된 문화계통으로 생각되나 정체적(停滯的) 신석기문화가 특징이었다. 한편 1983년 5월에는 경북 울진군 평해읍(平海邑) 후포리(厚浦里)에서 BC 10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황갈색 점토층에 인골(人骨)과 더불어 돌도끼가 널려 있는 한국 최초의 신석기시대 매장시설(埋葬施設)이다. 그 양식은 돌도끼를 무수히 깔고 그 위에 세골(洗骨)한 것으로 보이는 인골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3∼4층위를 이루고 있다. 정교하게 가공된 돌도끼는 길이 4∼5 cm의 소형과 80 cm가 넘는 대형 등 다양하나 거의가 대형으로 모두 120여 개가 출토되었다. 학계에서는 이제까지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이 주거지(住居址)인데 매장형식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그 역사적 가치를 들고, 특히 돌도끼의 모양이 종래의 민무늬토기시대의 것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띠며 인골과 돌널[石槨]이 그대로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묘제(墓制)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 나라 선사시대의 미술은 생활과 직결되는 기능적인 미술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청동기 시대에 와서부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마제석기와 갈판 지탑리 유적에서는 돌보습이 57개나 출토되었고, 다른 유적에서도 돌도끼, 돌괭이, 돌낫, 갈판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농지 경작 방법, 추수 방법, 조리 방법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곧 곡식이 잘 자랄 수 있는 곳에는 이미 다른 식물이 자라고 있으므로 불을 놓아 경작지를 만드는 화전농법이 이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작지에는 돌보습을 이용한 갈이농사도 부분적으로 실시하였다. 돌보습은 돌괭이가 발달하여 만들어졌고 보습날은 나무틀에 매어서 사용하였다. 날을 세우는 장치와 사람이 끌 수 있는 장치가 나무로 만들어지고, 인력에 의한 갈이농사를 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작지를 곰배괭이를 이용해 고른 다음 돌이나 사슴뿔로 된 굴봉이나 괭이를 이용하여 씨를 뿌렸으리라 추정된다.
덧무늬 토기 신석기시대의 가장 오랜 토기로서 빗살무늬토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것이다. 그릇 표면을 약간 돋아나오게 띠모양의 흙을 덧붙인 토기이다. 최근 양양 오산리에서 발견된 것은 그 연대가 서기전 5100대로 나타나 이제까지 나온 것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간 것이다. 그외 출토지로는 경남 통영 上老大島와 知島, 부산 東三洞, 울주 新岩理, 강원도 양양 등으로서 우리 나라 동남해안과 서쪽 인접해안, 그리고 동해안에 국한되어 있다. 형태는 부산에서는 둥근 바닥도 나오나 원칙적으로 작은 납작바닥의 밥사발 모양이고 아가리 바깥둘레(어깨)부분에 톱니(지그재그)무늬 또는 여러 줄의 평행선을 돋을무늬로 돌리고 있다. 똑같은 토기가 에서는 톱니형식이 다시 바이칼 서쪽 예니셰이江 유역에서도 나오고 있어 서로 연관이 있다고 믿어진다.
빗살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에서는 빗살무늬 토기 외에도 덧무늬 토기, 이른 민무늬 토기 등 다양한 무늬와 형태를 지닌 토기들이 발굴되고 있다. 특히 지역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무늬, 형태를 기준으로 동북, 서북, 중서부, 남부 지방 등으로 나누어 이해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중서부 지방의 빗살무늬 토기는 뾰족한 바닥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남부 지방의 그것은 뾰족한 바닥이면서도 더 둥근 편이며, 동북 지방의 그것은 납작 바닥의 깊은 바리 모양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해안지방의 아가리무늬토기에는 물고기뼈무늬(平行 線의 긴 빗금무늬띠를 위·아래 또는 옆의 것과 서로 방향을 다르게 배치한 것)를 넣은 것이며 아마 서해안지방 어디에선가 기원전 4천 연대에 생겨난 듯하며 서울 江東區 岩寺洞에서는 기원전 4천 연대의 방사성 탄소연대가 나오고 있다. 이 토기는 처음에는 아가리무늬, 허리무늬(고기뼈무늬), 바닥무늬(같은 방향의 평행사선무늬띠)의 3부로 구성되다가 먼저 바닥무늬, 그리고 허리무늬가 없어지는 변화과정을 밟는다. 한편으로는 아가리무늬와 허리무늬 사이에 조그맣게 나타나던 點線·曲線무늬가 점점 커져서 아가리무늬 아래의 다른 무늬를 몰아내고 큼직큼직한 同心半圓무늬, 물결무늬, 끈무늬 등으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후기에 나타나는 이 곡선무늬는 중국 채색토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바늘과 바늘통 실은 옷을 만들거나 깁거나 꿰매는 데 썼고 그물을 만들기도 하였다. 바늘귀가 있는 뼈바늘은 오늘날의 것과 큰 차이가 없는데, 궁산리 유적에서 나온 뼈바늘 하나는 바늘귀에 꿴 실이 감겨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조개무지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실이 썩지 않았던 것이다. 가락바퀴나 뼈바늘 등의 유물은 이미 신석기 시대에 식물성 섬유로 베실을 잣고 천을 짜서 의복을 만들고 그물도 만들었음을 보여 준다. 짧은 섬유의 경우는 섬유를 길게 이으며 뒤 꼬임을 주어 실을 만들고 긴 섬유의 경우는 꼬임 만을 주어 실을 만드는 방적구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이다. 토제, 석제, 도자제 등으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락바퀴는 그 중앙에 둥근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 구멍을 통하여 가락바퀴의 축이될 막대를 넣어 고정시킨 상태로 만들어서 완성시킨다. 막대의 위쪽 끝에는 갈퀴를 만들어둔다. 섬유를 이어 꼬임을 주면서 실을 만들거나 긴 섬유자체에 꼬임을 주어 실을 만들거나간에 가락바퀴에 막대를 움직이지 않게 끼고 한손에 섬유 또는 꼬임을 주려는 실을 잡은 뒤 다른 한 손으로는 실끝을 잡아늘여 막대에 잡아매고 가락바퀴를 늘어뜨려 일정한 길이로 실이 뽑히도록 자세를 잡은 다음에 가락바퀴를 회전시키면 실이 느러뜨려지는 순간 꼬인다. 일정한 길이로 늘어진 실은 막대에 감기면서 계속하여 실이 만들어진다. 가락바퀴가 발달된 형태가 물레이다.
여자 조각 함경북도 웅기군 서포리의 신석기 문화층에서는 송곳, 삿바늘, 혹은 그물뜨기에 쓰인 바늘 등의 자루 부분에는 장식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무늬를 새긴 것이 적지 않다. 생활용품에 예술적인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무늬들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도식화한 것들인데, 짐승 사람 형상 기하학적 무늬 등이 있다. 그 중 여자의 몸을 닮은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이 몸통 조각상은 얼굴을 단순화시키고 여자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슴이나 엉덩이를 실물의 비율 이상으로 과장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정교한 간석기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조각 솜씨의 부족이라 보기는 어렵고,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에 비하면 생산이 늘었지만 아직까지도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야 했으며, 자신들의 종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다. 가슴이나 엉덩이가 강조되는 이유는 그 부분들이 종족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 시기가 여자 중심으로 운영되던 모계사회였기 때문이다. 이 여성 조각은 아마도 이 시대 사람들의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풍요로운 생활, 종족의 유지와 번창을 비는 호신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개,새, 기타조각 함경북도 청진시 농포 유적, 웅기군 서포항 유적, 부산 동삼동 유적에서 나온 신석기 시대의 조각품을 통해 신석기인들의 사유가 추상화된 정도, 자연에 대한 이해의 수준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신석기인들은 사물을 표현할 때 그 특징만을 강조하여 묘사하였다. 이는 그들이 어느 정도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여 실생활과 연관시켜 생각하기 시작했음을 말해 준다. 이제 신석기인들은 무계획적으로 자연을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여 실생활에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사물을 보는데 점차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모양을 본뜨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였다. 빗살무늬 토기에 새겨진 무늬들 역시 단순히 장식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자연 섭리에 대한 그들의 파악도 자연현상이나 산, 하천 같은 자연물에도 혼령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의 표현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의 조각도 그들의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 사상, 혹은 사람과 영혼 또는 하늘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인 무당과 주술의 힘을 믿는 샤머니즘(Shamanism)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자기 씨족의 기원을 특정 동물과 연결시켜 숭배하는 토테미즘(Totemism)과 연관이 있다.
암사동 움집 터 암사동 움집터에서는 불탄 숯기둥이 넘어져 있어 집 구조를 밝히는데 아주 좋은 자료이다. 움집은 불충분한 난방을 보완하기 위해 땅을 둥근 모양이나 네모꼴로 60-70cm정도 깊이로 파서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운 다음 동물의 가죽, 나뭇가지 등으로 덮어서 만들었다. 가운데는 냇돌로 화덕을 만들었고 저장 구덩이도 설치하였다. 출입구는 햇볕이 잘 드는 남쪽으로 냈다. 움막의 크기는 직경이 대략 4-6m로 성인 4명 정도가 살기에 적당한 크기이다. 움집 안팎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화살촉, 뗀 돌도끼, 간 돌도끼, 갈판, 망치, 괭이, 보습, 그물추, 발화석, 낫 등의 석기가 나왔다. 움집은 15-20채 정도가 한곳에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집단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움집은 외형상 지붕과 벽체가 분리되지 않았다. 서까래의 아랫도리가 땅에 닿게 만든 움집이었다. 원형 바닥의 집에는 원추형의 고깔 지붕을 덮었다. 기둥이나 지붕에 쓴 서까래와 들보는 나무였으며, 지붕에는 풀, 짚, 갈대 등으로 덮거나 짐승 가죽을 덮기도 했다. 집터는 초기에는 둥근 모양이었으나 점차 네모꼴로 바귀었고, 정사각형에서 직사각형으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것은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가족의 규모와 살림살이가 늘어나는데 대비하여 집의 규모를 넓히는데 있어서 원형보다 네모꼴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화덕이나 출입구 근처에 저장 구덩이를 마련하여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하였는데, 신석기 시대 생산력의 증진된 정도를 보여준다. 당시 주거지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였고 출토 유물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 아직 빈부나 계급의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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