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 / 드로잉 ( 素描 : drawing/dessin )
일반적으로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선으로 그리는 회화표현. 프랑스어 데생의 역어이며 데생은 ‘그린다’는 뜻의 프랑스어 ‘데시네(dessiner)’에서 나온 말이다. 동양화의 묘법 가운데 선으로 윤곽을 나타내는 구륵법(鉤勒法)이나 먹의 농담으로 형태의 명암을 나타내는 몰골법(沒骨法) 같은 선묘법도 넓은 뜻의 소묘에 속한다. 소묘는 그리는 목적에 따라
① 인상의 파악, 세부의 기록, 건축·조각·회화작품의 착상의 전개를 위한 스케치(크로키),
② 운동감·명암법·해부학 등의 회화적 표현의 탐구 및 표현기술의 훈련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 완성작의 세부 또는 전체의 구도를 뚜렷이 나타내기 위한 습작,
③ 벽화나 태피스트리 등의 원작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카르통),
④ 독립된 완성작품으로서의 소묘로 구별된다.
그리는 대상에 따라 석고소묘·인물소묘· 정물소묘 등으로 구별되며 그리는 방법에 따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사실적· 구상적(具象的) 소묘, 대상을 가지지 않고 작가가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느낌 또는 이상을 선으로 직접 그려내는 추상적·비구상적 소묘, 어떤 순간의 인상을 재빨리 옮겨 그리는 크로키, 대상의 세부를 세밀·정확하게 그려내는 정밀묘사의 구별이 있다. 소묘의 재료로는 메탈포인트· 연필·크레용·콩테·초크·파스텔·목탄 및 붓과 먹 등이 있으나, 연필소묘·목탄소묘· 콩테소묘 등이 일반적이다. 소묘는 대개 종이 위에 그리며 따라서 재료의 성질에 알맞은 종이를 찾아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소묘에서는 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묘는 선으로 대상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대상에서 형체·비례·원근·명암·양감(量感)· 질감(質感)·동세(動勢) 등을 관찰하여 단색선으로 형태를 창조해낸다는 점에서 모든 조형표현의 기본이 된다. 소묘는 일찍부터 화가의 표현동기를 기록하거나 어떤 그림의 예비적 습작이나 밑그림으로서 본격적인 회화작품 제작을 위한 예비적 단계의 그림이나 그 과정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화가의 시각과 그 묘법의 다양성이 그 화가의 생각이나 느낌 또는 이상을 순수하고 자유롭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라고 이해하게 되어, 소묘는 하나의 독립된 회화표현 예술로서 가능성이 새롭게 탐구되고 있다.
【소묘의 기원과 역사】 거친 바위 표면에 동물들의 형상을 대충 선으로 나타낸 선사시대 동굴벽화도 일종의 소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묘가 미술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르네상스시대이다. 중세 서양에 참된 뜻으로서의 소묘가 없었던 것은, 소묘의 정신적 바탕이 되는 화가의 개인적 자유가 없었고 물질적 바탕이 되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15세기에 비로소 소묘가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이디어 스케치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뒤러 등에 의해 소묘는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등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화가들은 많은 소묘를 남겼다. 그리려는 유화나 프레스코를 위하여 매우 세밀하게 그린 것에서부터 즉흥적으로 그린 것, 모델을 스케치한 것, 손이나 머리 같은 부분을 연구하면서 그린 것에 이르기까지 화가 자신들을 위한 작업의 일종이었으므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소묘를 소중히 다루었다. 17세기에 루벤스와 렘브란트는 소묘에 붓과 먹을 사용하였으며, 명암 대조를 극적으로 표현한 데생을 주로 다루었다. 18세기에도 소묘는 명암을 그리는 데 집착하여 궁정취미의 우아하면서 자극적인 정취를 나타내었다. 다만 에스파냐의 고야만이 붓과 먹 외에도 펜·크레용·파스텔 같은 여러 가지 재료로 자신의 작가적 기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회화를 대표하는 다비드와 앵그르의 소묘는 뚜렷한 윤곽선과 정확·세밀한 대상묘사가 엄격하였고, 낭만주의회화를 대표하는 제리코와 들라크루아는 격렬한 무브망(mouvement:動勢)을 강조하여 힘과 운동감에 넘치는 격렬함을 나타내었다. 그 뒤를 이은 자연주의나 사실주의회화는 대상을 현실에서 찾는 새로운 입장이었으나, 실제로 소묘에서는 대상을 현장에서 스케치한 것이 아니었다. 가령 도미에가 그린 《의원(議員)의 캐리커처》 같은 것은 먼저 의회에서 의원들을 본 다음 화실에 돌아와 점토(粘土)로 인물상을 만들어 그것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대상을 충분히 관찰한 다음 기억을 되살려 그리는 수법은 쿠르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근대 소묘의 발전】 인상주의회화는 소묘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때까지 대상의 형태를 그리는 데 쓰여온 소묘가 인상파화가들에 의해 오히려 빛의 효과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쓰이면서, 소묘는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드가의 소묘는 예외적으로 앵그르의 선묘(線描)를 연상시키는 형태의 엄격성을 보이나, 모네와 그 밖의 인상파화가들은 그들이 주장한 ‘순간의 인상’의 포착과 그들이 발견한 ‘태양의 효과’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면서 두 가지 새로운 소묘방법을 개발하였다. 하나는 크로키에 의한 대상의 순간적 인상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실선(實線)에 의한 빛의 효과표현이었다. 또 빛의 효과의 소묘를 위해 이들은 굵고 힘찬 윤곽의 실선을 쓰게 되었는데, 형체의 선적(線的) 표현을 뚜렷이 하기 위해 윤곽선을 실선으로 그려나가는 방법은 반 고흐와 고갱의 소묘에서 볼 수 있다.
인상파화가들에 의한 소묘의 새로운 표현확대는 잇달아 피카소·브라크·마티스의 소묘에서 실선에 의한 회화적 표현효과의 강조와 추상적 소묘의 탄생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추상회화의 소묘는 선 자체가 가지는 성질, 예컨대 속도·동세·짜임·리듬 등의 성질을 살려 선에 의한 추상적 표현을 시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 선이나 점이 얼룩져 만드는 반점 같은 선의 효과를 살려 그린 타시즘의 회화표현이나 비정형·비구상적 회화를 주장하는 앵포르멜회화의 소묘에 이르러서는, 선에 의한 표현은 동양의 붓글씨가 가지는 서도(書道)의 표현력과 기호성· 상징성의 영향으로 점차 현대미술에서 하나의 독립된 자율적인 표현예술로서 그 의미와 가능성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슈퍼리얼리즘의 등장으로 사람의 손으로 그린다는 행위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강조되면서, 소묘는 또는 어떤 기계에 의한 묘사 표현충동·묘사력의 실현매체로서 폭넓게 가능성이 탐구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드로잉은 단순한 작품의 밑그림이나 준비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된 완성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드로잉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미술에서 드로잉은 장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적인 예술적 가치를 갖는 표현방법이나 스타일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드로잉은 가치를 획득하면서 자유로와졌다. 말하자면 장르적 특수성에 대한 확인이나 배려를 받지 않고서도 미술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예술의 각 분야에서 장르의 융합과 이탈이 일상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드로잉의 자유로운 응용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되어 사실상 어떤 작품이 드로잉이냐 아니냐하는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까지 되었다. 오늘날 밑그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적 의미에서는 더 이상 ‘드로잉’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드로잉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고 또 유의미하다. 다시 말해 오늘날 작가들이 드로잉을 다루는 방식은 드로잉적인 것을 차용하거나 드로잉적인 것을 다양하게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드로잉적인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 특성들은 거론될 수 있다. 그것은 대체로 면보다는 선에 의한 묘사, 고의적으로 공들인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일회적 선 긋기, 신체의 움직임에 밀착되어 있는 우연하고 자발적인 제스처, 화면을 꽉 채우는 구성보다는 무의식의 흐름을 보여주는 개방적이고 열려있는 구성, 고의적으로 미완성을 추구하는 것,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문자나 기호와 같은 회화 외적인 것을 도입하여 ‘그리기’의 경계선 너머로 가려고 하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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