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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레오나르도 다빈치_Leonardo da Vinci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20.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 1452.4.15~1519.5.2)

 

 

작가연보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피렌체 서쪽 빈치 마을에서 출생.

부친 피에로는 피렌체의 공증인이며, 레오나르도는 서자로 태어나 조부의 집에서 자랐다.
1472년 (20세) 피렌체의 화가 조합에 등록.
1473년 (21세) 코페르니쿠스 출생 / 레오나르도 화가 조합에 받아들여짐.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풍경 소묘화에 「8월5일」기입.
1476년 (24세)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제단화가 스승인 베로키오에게 의뢰되었는데, 레오나르도는 클레디와 합작 <受胎 告知>를 그림.
1480년 (28세) 마젤란 출생 스승 베로키오가 3년에 걸쳐 계속해 온 피렌체 본당 은제단의 부조 <세레 요한의 참수>제작에 협력. 또한 <콜레오니 騎馬像> 구상도를 만들어 베로키오에게 제공.
1481년 (29세) 3월, 스코페트의 성 도나트 수도원 주제 단호를 의뢰받음(동방박사들의 경배). 이 그림이 <3王來朝>인데 완성시키지 않음
1482년 (30세) 밀라노의 섭정 스포루차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감. <스포루차公 騎馬像>제작에 관한 협의.
1483년 (31세) 4월25일, 밀라노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신심회 예배당 제단화 <岩窟의 聖母>를 의뢰받음. 라파엘로, 루터 출생.
1487년 (35세) 8월8일, 9월30일 두 번에 걸쳐 밀라노 대성당의 설계료를 지불받음. 1488년 티티안 출생.
1489년 (37세) 4월과 5월에 그림 데상에 인체해부학을 연구한 흔적이 보임.
1490년 (38세) 6월8일, 파비아 대성당의 설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파비아에 들르도록 로드비코 공의 명을 받음 레오나르도, 자신의 공방 만들다.
1493년 (41세) 레오나르도의 생모 카테리나, 밀라노에 옴. 11월 30일, 독일 황테 맥시밀리안과 비앙카 마리아 스포루차의 결혼식 날 레오나르도의 <스포루차 騎馬像>이 성내 광장에 공개됨.
1495년 (43세) 이 해부터 <최후의 만찬>제작에 착수. 스포루차성의 작은 방 장식을 제자들과 함께 함. 생모 카테리나 사망. 이 장례비 메모가 남아 있음.
1497년 (45세) <최후의 만찬>거의 완성. 파치올리의 「神聖 比例」저술에 협력. 1498년 (46세) 파치올리의 「神聖 比例」 로드비코에의 헌사가운데, <최후의 만찬>이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레오나르도의 재능이 걸출하다는 등이 기록되어 있음.
1499년 (47세) 프랑스 루이 12세 베네치아, 피렌체와 동맹, 밀라노를 침공. 이때 스포루차 기마상 모형이 파괴됨. 연말경 밀라노를 떠나 피렌체로 향발.
1500년 (48세) 피렌체로 가는 길에 만토바에 들러 이사벨라데스테의 초상화 고(稿)를 그림. 3월에는 베네치아에 체류 8월 전에 피렌체에 도착.
1501년 (49세)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세르비티가에서 일행과 함께 거주. <성 안나> 畵稿를 그림. 또한 소품 <紡車의 성모>제작. 과학연구에도 몰두.
1502년 (50세) 제잘레 보르지아, 로마냐 공이 됨. 레오나르도는 보르지아의 군사토목기사로 로마냐 지방에 출장, 여러 곳을 순방.
1503년 (51세) 3월, 피렌체로 귀환. 7월 24일, 알르노 강 수로 변경 계획서를 제출.
1504년 (52세) 1월25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설치 장소를 결정하는 위원회에 참석.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10남 2녀를 남기고 사망.
1506년 모나리자 완성
1506년 (54세) 6월6일의 일기에 <앙가리의 會戰>을 위한 칼튼이 악천후로 인해 조각났다고 씀.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실패. 가을에는 완전히 단념.
1506년 (54세) 4월27일, <岩窟의 聖母>를 다시 그리기로 약속. 4월30일 부친의 유산 상속인 가운데 레오나르도가 빠졌음. 6월1일 밀라노 향발.
1507년 (55세) 5월,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왕의 화가가 됨. 9월 피렌체에 일시 귀환.
1508년 (58세) 피렌체의 피에로 마르첼리가에 머물면서 물리, 수학 노트를 하기 시작함. 7월 밀라노로 돌아옴.
1510년 (58세) 이때 해부학 연구에 열중, 해부학자들과 자주 접촉.
1512년 미켈란 젤로, 시스틴 성당 천장화 완성. 1513년(61세) 밀라노의 비올라가에서 거주. 9월24일 메르시, 사라이 등과 함께 로마로 향발. 교황 레오 10세가 제공한 바티칸 궁의 별실에서 수학과 과학을 연구.
1514년 (62세) 9월, 바르마, 산탄젤로 등지를 여행. 「원의구적법」, 「굴곡면의 기하학」 등 집필.
1515년 (63세) 레오나르도는 19일자 일기에서 그의 후원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결혼을 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는 것과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기숙. 프랑소와 1세 즉위.
1516년 (64세) 3월17일, 줄리아노 데 메디치 사망. 로마에서의 후원자를 잃음. 이탈리아를 떠나 앙브와즈로 향함.
1517년 (65세) 5월 프랑소와 1세의 별장인 프랑스 앙보와즈 교외 클레성에 체재.
1518년 (66세) 5월3일~16일까지 앙보와즈에서 열린 축전에 그가 고안한 기계 등을 전시. 또한 프랑스 왕의 여러 건축에 관여.
1519년 (67세) 4월 23일, 유언장 작성. 메르시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명하고 그의 작품과 수기들을 건네줌. 5월 2일 사망.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 피렌체 근교의 빈치 출생. 공증인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사꾼의 딸 카테리나이다. 그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전쟁을 경멸했던 친절한 채식 주의자이었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 생각한다면, 어떤 개념도 그를 규정짓기에 충분치 못하다. 그는 특정 시대와 관련지을 수 도, 일정한 범주로 묶을 수도 없는, 알아갈수록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레오나르도는 바타칸의 아첨꾼과 떠버리, 연설꾼 그리고 궁정 안의 독선적인 지식인을 조롱했다. 그들의 빈약한 재능을 경멸하고, "자기 생각도 없이 단순한 기억력에 의존해 선례만을 차용한다."며 비웃었다. 반면 레오나르도의 동료들은 그가 단순한 발명가일 뿐이며,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그의 지식은 순전히 관찰과 독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조금씩 습득해 나간 것이다. "화가는 자연에 대해 대화와 경쟁 관계에 있다." 레오나르도가 한 말이다. 그는 자기 주변의 세계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자로서 회화를 과학으로 간주하고 그 영역을 단순한 재현 이상으로 확대시켰다.  자신의 회화와 소묘속에서 인간 지식의 미개척 분야를 역전시키고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레오나르도는 소묘를 통해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으며, 이것이 결국 과학적방법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가지 질문의 해답을 발견하면 즉시 또 다른 문제를 향해 돌진하는 탐구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등등 어는 명칭에도 해당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떤 한계도 훌쩍 뛰어 넘어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인체해부 및 빛과 그림자의 연구를 비롯한 과학연구는 새의 비행이나 지질, 지지학, 식물학, 입체 기하학을 거쳐 슈류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등에 이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많은 업적을 이룩한 것은 그의 뛰어난 창조성에 기인한다. 창조성이란 상당히 복합적인 개념이다.거기에는 유동성, 유연성, 준비성, 그리고 독창성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유동성은 수많은 생각들을 안출해 내는 능력이고, 유연성은 서로 다른 원천들로부터 유래하는 매우 다양한 응답들을 제공하는 능력임에 반해, 독창성은 뻔한 것,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과 연관되지 않은 생각들을 인출해 내는 능력이고, 준비성이란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개선하는 능력을 뜻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명화를 그린 단순히 위대한 화가로 불리우진 않는다. 레오나르도 자신 역시 '로도비 코스포르자공'에게 보낸 36가지 안건에서 볼 수 있듯이 판화, 대리석, 금속, 미술 분야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과학의 한 분야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레오나르도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보면서도 한편, 그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 어떤 개념으로도 그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며 시대의 대표작을 배출해 낸 위대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 동시에 규정불가의 위대한 인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