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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오귀스트 르네 로댕_Rene-Francois-Auguste Rodin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20.

오귀스트 르네 로댕(Rene-Francois-Auguste Rodin)

 

 

로댕 - 미의 본질을 향한 노력

 오귀스트 로댕[ August Rodin ]은 1840년 11월 12일 파리 22번구의 라르발레트(rue de l''Arbalet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장 바티스트(Jean Baptiste)는 대부르주아들이 루이 필립을 왕으로 옹립했던 7월혁명과 함께 산업화의 물결이 일렁이던 1830년에 노르망디로부터 파리로 이주한 농부출신이자 왕당파로서 하급공무원이었는데 늦게 결혼하여 위로 두 딸을 가진 뒤 로댕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과묵한 성격의 로댕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발 드 그라스(Val de Grace)가에 있는 예수회 교단이 운영하던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종교교육 시간의 교리문답 공부에 제일 어려움을 느끼는 평범한 학생으로 성장했다. 당시 그의 성적을 보면 수학은 낙제였고 라틴어와 문법을 싫어했지만 지리와 역사에는 흥미를 느꼈던 것을 알 수 있다. 1848년 이후 아버지의 생각이 왕당파로부터 공화파로 기울어지던 때, 로댕의 시력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하였고, 알렉상드르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성적은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던 로댕은 에콜 데 보자르에 낙방하고 대신 장식미술을 가르치는 쁘띠 테콜(Petite Ecole)에 입학하여 기초소묘, 해부학 등 전통적인 장인교육을 받았다. 이 당시 로댕은 아버지를 모델로 최초의 소조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쁘띠 테콜에 다니면서 로댕은 루브르박물관에서 작품을 유심히 관찰하며 조각수업을 하였다. 그러나 누이인 마리의 죽음에 따른 충격으로 일 년 동안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로댕은 1863년 그곳을 떠나 카페 게르보아(Cafe Geurbois)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카페 게르보아는 인상주의 운동의 산실로서 드가, 마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 화가는 물론 프랑스 예술의 장래를 혼자 짊어진 듯 행동하던 달루(Jules Dalou) 등이 단골로 드나들고 있었으므로 로댕은 여기에서 마네, 르누아르와 친해졌다. 이 반항적인 작가들은 모두 당시 관전인 살롱에 낙선한 예술가들로서 독자적인 전시를 열어 살롱의 진부한 분위기를 일신하자는 데 의기투합하고 있던 중이었다. 낙선전은 처음부터 대중의 비난과 야유를 받은 전시였는데 공격의 대상은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식사>란 작품이었다. 파리의 대중들이 이 작품에 대해 격분했던 이유 중 하나는 두 명의 부르주아풍 남자가 누드 여인과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 외설스럽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폴레옹3세조차 낙선전을 돌아보고 "작품의 예술적 수준이 떨어지고, 속되고 외설스러우며 모독적"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정도였는데 이 비난의 대상은 주로 마네의 작품으로 집중되었지만 자신이 관대한 통치자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폐관을 명령하지는 않았다. 장식조각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하던 로댕도 낙선전에 출품하고 싶었지만 작업실도, 재료를 살 돈도, 모델도 없었기 때문에 고민하던 중 비비란 허드렛 일꾼을 알게 되고 그를 모델로 작업을 시작하여 완성한 작품이 <코가 깨진 남자>였다. 로댕이 이 작품을 1864년의 살롱에 출품하자 추악하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는데 당시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이 두상을 자신의 교실로 가져가 학생들에게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이라 소개하여 학생들이 감탄하자 "사실은 로댕이란 이름없는 작가가 만든 작품"이라고 밝힌 일화는 유명하다. 비록 살롱에서 거절 당하고 보자르 교수로부터 수모를 받긴 했으나 로댕은 "이 흉상이 이후에 나올 내 작업을 결정했다"고 훗날 실토했을 만큼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코가 깨진 남자>를 제작하던 시기에 로댕은 로즈(Rose Beuret)란 여성을 만나 동거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그녀의 도움으로 르브렁가의 허름한 마굿간을 빌어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는 그녀와 평생 같이 살았지만 자신이 죽기 직전에야 결혼했다 . 로즈를 모델로 <미뇽>을 제작하여 1865년 살롱에 출품하였지만 결과는 역시 낙선이었다. 이 해는 마네의 <올랭피아>가 ''신화적이고 이상적인 비너스상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을 그것도 세련되지 못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세간의 물의를 일으킨 해이기도 했다. <미뇽>은 <코가 깨진 남자>에 비해 ''완성형''에 가까운 것이으로서 전문적인 초상조각이라기보다 자신의 모델과의 정서적 관계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후 1866년에 로댕은 <바캉트>를 출품할 예정으로 다시 로즈를 모델로 제작했으나, 마굿간에서 새 작업실로 이사하던 도중 박살이 나버렸고, 그해 1월에 로즈가 첫 아들을 출산하자 그는 제2제정 시대에 장식조각가로 이름이 알려졌던 카리에 벨루즈(A.-E.C.-Belleuse)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 1870년 나폴레옹3세가 독일과 전쟁을 감행하자 로댕은 ''국민군''으로 입대하여 잠시 복무하였으나, 프랑스는 패하고 그 또한 병으로 전역하였는데 귀가 후 궁핍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쟁을 피해 중립국인 벨기에로 피난해 공방을 운영하고 있던 카리에 벨루즈의 공방에 취직하였다. 1871년 5월에는 파리코뮌이 결성되고 노동자, 농민, 하급관리, 소상인들의 주동으로 파리의 행정을 장악했으나 유혈사태는 계속되었다. 브뤼셀에 있던 로댕은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했을 때보다 더 기근이 심하다는 것과 함께 2000여명의 코뮌지지자들이 베르사유 군대에 의해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차례 파리를 다녀간 것 외에는 줄곧 브뤼셀에 머무르며 반 라스부르(Antione-Joseph van Rasbourg)와 함께 건축장식 조각업에 종사하던 로댕은 이 동업자의 재정지원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며 이탈리아에서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볼 수 있었다. 브뤼셀에서 네이(Auguste Neyt)란 젊은 군인을 모델로 <패자>란 작품을 제작하여 브뤼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실물에 의한 주조''란 팻말과 함께 후미진 구석에 전시되는 수모를 받아야 했으며 <패자>에 대한 악평은 계속되었다. 사실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영웅이 아니라 비애로 가득 찬 근대인, 이름없는 아폴로를 형상화한 것인데 브뤼셀의 악평을 뒤로 하고 이것을 파리로 가져와 <청동시대>로 이름을 바꿔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파리의 반응 역시 브뤼셀과 마찬가지였다. "속되고 외설적이며 육체적 쾌락을 자극하는 작품"이란 혹평과 함께 "뒤에서 보면 소년같이 가는 허리와 관능적인 둔부 등으로 사실 중성을 형상화한 것"이란 지독한 악평을 들어야만 했고 세간의 떠들썩한 스캔들에 놀란 심사위원들은 랭뒤스트리 궁에서 <청동시대>를 철거하란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작품이 실제 인물을 그대로 뜬 것인가 아닌가를 판명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까지 구성되는 등 소동은 끊이지 않았다. 로댕은 이 작품이 위작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모델의 사진까지 증거로 제시하였으나 결국 그는 조사위원과 비평가들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로댕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페피노란 이탈리아 사람을 모델로 <세례요한>을 제작, 1880년 살롱에 <청동시대>와 함께 출품하여 <세례요한>이 삼등상을 받음으로써 프랑스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세례요한은 인간적이고 거칠게 다듬어진 나체를 하고 있으나 생명과 활력에 넘치는 성인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었다. 로댕에게 있어서 미의 본질은 생명이고, 예술에서 생명의 가장 고귀한 표현은 움직임을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 인간형상이었다. 개척과 해방의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동적이면서 매우 현실적인 동세를 지닌 이 작품을 위해 로댕은 먼저 팔과 두상이 없는 <걷고 있는 사람>이란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관심이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신체 부위를 어떻게 표현하여야 하는가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허버트 리드로 하여금 ''지나치게 인위적인 보조수단에 의하지 않고 동작의 길을 열어놓은 최초의 조각가가 로댕''이라고 단언하게 만들었다. 로댕은 동작이란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므로 스냅사진은 동작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사진은 동작을 구속할 뿐 아니라 생생한 동선을 완전히 마비시켜서 비활성적인 요소로 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조각가는 동작의 시닥과 그 완성을 모두 보여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한 동작은 두 개의 평형점 사이에 깃들여 있는 긴장이라고 할 수 있다. 로댕과 (그의 대화상대였던) 젤은 로댕의 작품인 <세례요한>을 앞에 놓고, 힘차게 대지를 딛고 있는 왼쪽발과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시선 사이의 균형을 관찰하였다. 이 조상은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으며, 오른발이 땅을 딛기 위해서 앞으로 뻗어 있다. 한편 들어올린 왼쪽 어깨는 뒤쪽에 처져있는 왼발을 내딛기 위해 그쪽으로 다시 몸무게를 실으려는 듯이 보인다. 만약 이 작품을 감상할 때, 이러한 순서로 몸의 움직임, 즉 근육의 긴장의 연속을 ''읽는다면'' 실제 동작을 보는 듯한 강한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환영이다. 사진처럼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느끼게 하려는 조각가 자신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환영이다. (허버트 리드,『조각이란 무엇인가?』, p.101.) <세례요한>의 세속적 성공은 <코가 깨진 남자>로부터 따지자면 실로 16년만에 로댕의 작품이 살롱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침내 그해 그는 제3공화국의 정치이념인 인간의 우애, 권리를 문으로 표현해 줄 것을 주문받아 <지옥의 문> 제작에 착수하였다. 지옥의 문은 파리의 장식미술관 건축을 위해 복권을 발행하여 조성한 자금으로 주문된 것인데 1877년 살롱에 출품된 <청동시대>가 실제 사람을 직조한 것이란 혐의로 고소되었을 때, 조사위원이었던 사람이 장식미술관 건설책임자인 에드몽 튀르케(Edmond Turquet)의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로댕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 비서관은 로댕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1880년에 작품을 구입 뤽상부르 공원에 설치하였으며, 튀르케에게 로댕의 지지를 요청하여 이를 수락함으로써 로댕은 생애 처음으로 정부소유의 작업실과 8000프랑의 돈을 받았다. 1880년에 시작한 <지옥의 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진행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로댕은 <지옥의 문>의 주제를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편(Inferno)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술적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으로 디자인하였다. 로댕의 초기 건축적 소묘를 보면 문의 전면부가 8개의 독립된 패늘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바 그는 이 문을 위해 특히 피렌체성당의 기베르티가 제작한 <천국의 문>을 많이 참조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의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구조를 지닌 테라코타 습작을 완성하였다.  이 문의 주인공인 <생각하는 사람>은 작품의 중심의 윗부분에 앉아 지옥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데 그는 지옥을 바라보는 단테 혹은 조각가 자신이거나 로댕의 말대로 사고하는 인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의 전체구조에서 중요한 지옥은 제2제정의 부패와 퇴폐는 물론 모순된 시대의 고통과 격정을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방종, 허영, 타락, 절망, 고통, 죄의식이 점철된 지옥의 모습은 단테가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망명을 경험한 후 겪어야 했던 정치적, 윤리적, 종교적 문제로 고민하면서 집필한 지옥의 모습은 물론 요한계시록,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등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욕망과 고통, 심판과 정죄의 서사를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 랭보의 <지옥의 계절 Une saison en enfer>와도 정서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지옥의 형상 속에 단테의 지옥편에 나오는 우골리노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부분에 관한 한 로댕이 영향을 받았던 낭만주의 조각가 카르포가 1861년에 제작한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이러한 형상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서도 발견되는 바 전통이란 넓은 지평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로댕의 작품에 직접적 영감을 미친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산 로렌초 교회의 메디치예배당에 만들어 놓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몸을 웅크린 채 턱을 괴고 있는 형상을 들 수 있다.  로댕은 예술을 종교나 자연애와 같은 것으로 믿었다. 즉 그에게 세 가지는 모두 같은 것이었다. 그의 인물상들은 현실적인 것(자연), 이상적인 것(종교)이 처음으로 인성에 의해 결합되었다. 그의 상들은 더 이상 인간표정을 나타내기 위한 대리물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느낌을 복잡하고 강렬하게 형상화한 모습이었다. (도널드 레이놀즈,『19세기』, pp.45-46)
장식미술관 계획이 취소되자 로댕은 이 작품을 작업실에 놓아두고 37년 동안이나 인물을 더하거나 빼고 고치면서 구성, 공간, 표현의 문제에 대해 실험하였다. 예를 들면 지옥의 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순교자>의 형상은 당시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불거진 뼈를 가진 깡마르고 비참한 육신을 지니고 있다. 이 인물표현을 위해 로댕은 다양한 형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추락하는 남자> 역시 몇 차례에 걸쳐 나타난 주제로서 인간의 좌절된 욕망을 상징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그것은 태양 가까이 다가가려다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태양열에 녹는 바람에 떨어져 죽은 이카루스의 모습인 것이다.
 <지옥의 문>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로댕은 정부의 주문을 받기 위해 교섭하였으며 칼레시가 백년전쟁 중인 1347년 영국의 에드워드3세에게 포위 당했을 때 이 도시에서 가장 평판이 높은 시민 여섯 명을 골라 목에 밧줄을 묶은 다음 영국군의 진영으로 가 도시의 열쇠를 건낸 후 처형된다는 영국측이 제시한 항복조건에 따라 용감하게 자원한 시민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조형물을 세울 계획을 듣자 칼레시장을 자신의 작업실로 초청하여 결국 <칼레의 시민들> 제작계획을 성사시킨다. 이 계획은 시장의 사임과 재정지원을 담당했던 은행가의 파산으로 이루어지지 중단되었으나, 로댕은 이 역사적 기념물을 위한 작업에서 각 인물의 감정을 손의 표정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 후 1889년 조르주 쁘띠 화랑에서 가진 로댕과 모네의 전시가 주목받고 같은 해에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역시 그의 작품이 호평을 받자 칼레시는 애초에 그들이 주문했던 <칼레의 시민들>의 구입을 결정하였으나, 로댕이 이 작품을 지면과 같은 높이로 설치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침대 위에 놓여졌다.

 


  1881년에는 에밀 졸라가 회장으로 있던 문필가협회로부터 발자크의 초상제작을 의뢰받았으며, 1886년에는 달루를 제치고 그 전 해에 죽은 빅토르 위고의 초상조각을 주문받았다. 로댕의 예술세계가 농축된 <발자크상>은 그러나 이 문인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유령과 같은 것, "이름도 없고 조잡한 덩어리, 거대한 태아"란 이유로 거부당했지만 오로지 에밀 졸라가 그를 지지했다. 졸라에 이어 회장을 맡은 에카르가 로댕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실망하여 사임하자 다른 심사위원들도 모두 사퇴해 버렸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드레퓌스 사건이 로댕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나 1898년 상 드 마르스에 있는 한 화랑에서 그의 <입맞춤>과 <발자크상>이 전시되었을 때, <발자크상>만은 야유와 조소 속에 그가 정신착란에 걸렸다는 비난을 들었으나 그 군중들 속에서 부르델은 "바로 저것, 그는 우리 모두에게 길을 보여주었다"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석고상태로 뫼동의 작업실에 방치되다시피 했던 <발자크상>은 훗날 청동으로 주조되어 몽파르나스에 세워졌다.
 허버트 리드의 지적처럼 로댕은 조각의 독립성을 최초로 각성한 조각가였다. 로댕 이후 실제로 새로운 예술에 대한 태도, 즉 조각은 ''입체의 공간차지''라는 개념과 조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시각은 물론 양감과 중량감까지 동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로잘린드 크라우스,『현대조각사의 흐름 Passages in Modern Sculpture』, 윤난지 옮김, 예경, 1997.
도널드 레이놀즈,『19세기의 미술』, 전혜숙 옮김, 예경, 1991
허버트 리드,『조각이란 무엇인가?』, 이희숙 옮김, 열화당, 1984
모니크 로랑,『로댕』, 정진국. 이은진 옮김, 열화당, 1990.
Rudolf Wittkower,『Sculpture Process and Principle』, Harper & Row, 1977

 


출처 : http://plaza1.snut.ac.kr/~ctman 최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