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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로코코 미술_Rococo Art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20.

로코코 미술(Rococo Art)

 

 

 

 17세기의 바로크 미술과 18세기 후반의 신고전주의 미술 사이에 유행한 유럽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도 퍼져나갔다. 로로카이유(rocaille)와 코키유(coquille) 두단어가 합쳐진 글자로, 로카이유는 자갈을 의미하고 코키유는 조개껍데기를 말한다. 본래는 당시 귀족사회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장식양식 내지 공예품에 대하여 쓰인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이 시대의 프랑스 미술, 나아가서는 유럽미술 전반에 걸친 양식개념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로코코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상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코코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로코코양식은 그 당시의 프랑스 상류귀족여성들의 취미와 사회참여를 반영하며 재력과 야심있는 사교계의 마담들은 사회의 유명인사들을 로코코 살롱에 초대해 토론과 파티를 즐겼다. 이러한 프랑스 상류계급의 생활태도는 그 당시 유럽의 상류계급사회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사실 돈 많고 권태로와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애로틱한 예술이다. 이 시기에는 여성미의 이상 자체가 달라져서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정교한 것으로 되었다. 또한 로코코는 서구 최후의 보편적 양식이다.  오늘날에는 그 어원에서 오는 조소적(嘲笑的)인 의미는 불식되고, 독자적인 형식감정과 이에 부응하는 창조적이며 자율적인 가치를 가진 미술양식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로코코는 그에 앞서는 바로크 미술이 즐겨 쓰던 부정형(不定形)이나 유동적인 조형요소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바로크의 연장 및 변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바로크가 지녔던 충만한 생동감이나 장중한 위압감 따위가 로코코에서는 세련미나 화려한 유희적 정조로 바뀌었는데, 다시 말하면 바로크가 남성적·의지적(意志的)임에 비하여 로코코는 여성적·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로코코의 특색은 그 말의 어원인 로카유가 조개껍데기 세공(細工)이나 모양을 가리키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식미술, 특히 실내장식이나 가구류에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실내의 각 부분 또는 가구의 형태 등에 조개 모양이나 아칸서스무늬가 도입되고 혹은 그것들의 조합이라고 할 만한 곡선무늬가 뒤얽혀 물결친다. 건축가들은 당시의 살롱 문화를 배경삼아 이런 곡선을 활용하여 실내공간 자체를 원형적(타원형 또는 다각형)인 멋으로 처리하고 벽과 천장의 연결부분 또는 벽과 벽의 연결부분에도 분절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 구조를 고안했다.  직선·직각을 가능한 한 배제하여 부드러운 곡선이 자유롭게 교차하도록 만들고 벽이나 천장의 색채도 담백하고 우아한 색조, 예컨대 흰 바탕에 금색으로 곡선무늬를 안배하는 것 같은 배색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런 것은 바로크가 지닌 중후성이나 오만성과는 다른, 경쾌하고 화려한 취향이며 로코코의 특색은 어디까지나 회화적이고 평면적인 데에 있다. 로코코의 실내장식은 실내에 있는 그림·조각·공예·거울, 그 밖의 모든 것을 하나의 기조 위에 통합, 조화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그 특색은 공예품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가구나 집기류는 모두 경쾌하고 우아한 형태와 무늬로 만들어지고, 자기(瓷器)에도 지나치게 도안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인간이나 식물의 형태·무늬가 활용되었다. 좌우대칭의 전통이 깨지고 애시메트릭(asymmetric)한 자유로운 디자인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유럽에 유행하였던 중국 취미와 더불어 동양 공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로코코 건축의 최초 작품은 로베르 드 코트의 베르사유궁전 예배당인데 메소니에, 보프랑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어서 오베르, 가브리엘 부자(父子)와 쿠르톤 등이 활약하였고, 보프랑이 만든 오텔 드 수비즈의 타원형 살롱, 또는 가브리엘의 퐁텐블로궁의 회의실이나 베르사유궁전의 여러 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의 취미를 잘 전해주고 있다. 가구 분야에서는 C.크레상이 일찍이 레장스 양식을 완성하였고, 루이 15세의 궁정소속 가구목수인 A.고드로라든지 P.미종, 독일 출생인 J.F.에벤이나 그의 제자인 J.H.리즈너 등도 유명하다. 이 시대는 또 회화가 번성한 시대이기도 하였다. 단지 귀족들만이 아니라 서민층에도 회화취미가 침투하여 전람회(살롱)를 통하여 화가와 대중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미술평론이라는 새로운 장르도 나타났다. 엄격한 데생을 주장하는 푸생파(구파)와 색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루벤스파(신파)의 대립을 거쳐 이 무렵에는 이미 신파의 승리가 결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경쾌한 필치와 풍요한 색채에 의한 화려한 구도와 정서적인 표현방식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파 외에 베네치아파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색채와 함께 풍속화의 양식도 유입되어 사실적 표현이 애용되었다.로코코 미술의 성격은 루이 14세 시대의 장중한 위압감, 화려한 의식을 갖춘 궁정 생활이 낳은 바로크미술과는 달리, 가볍고 섬세한 색채와 문양으로 현란하기는 하지만 그 주체가 되었던 장식미술은 아름답고 화려하고 경쾌하게 약동하는 곡선의 활용과 좌우균형을 파괴한 자유로운 형식을 특징으로 하여, 장식적으로 문양화된 모티브와 자연주의적인 모티브가 뒤얽힌 것으로서 경쾌하게 공간 속에서 전개된 화려하고 친숙한 양식이다.  로코코 회화는 와토의 《시테라섬으로의 출범》(1717)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1721년 사망하기까지의 짧은 기간에 색과 선이 서로 융합되고 서로 연관되는 섬세·우아한 작품을 보이면서 품위있는 궁정 남녀의 유희도 등 걸작을 남겼다. 이어서 부셰나 그의 제자 프라고나르 등이 로코코조(調)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바토의 신선한 발상력은 차차 퇴조하여 코케트리는 에로티시즘으로 옮겨진다. 이런 현상은 프라고나르에 있어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궁정적 환경으로부터 부르주아적 환경으로의 이행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샤르댕은 소시민 사회의 겸허한 생활을 반영한 실내화나 정물화를 그렸고,‘교훈화’를 많이 그린 J.B.그뢰즈, 풍경화의 베르네도 이때 활약하였다. 뛰어난 초상화를 남긴 파스텔 전문화가 캉탱 드 라투르, J.M.나티에 등도 출현, 파스텔화를 독립된 회화로서 미술사에 올려놓았다. 조각에서는 J.B.피갈과 E.M.팔코네를 꼽을 수 있다. 로코코 양식은 먼저 프랑스에서 일어나 프랑스 왕권의 흥성과 함께 전유럽에 파급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것을 대폭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에서는 1720년경부터 약 50년간 로코코 양식이 건축계를 지배하였다. 다만 독일의 로코코 양식에는 바로크적인 장중미가 많이 남아 있는데, 장중한 건축과 경쾌 화려한 내부장식이 색다른 대조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