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1.24~1901.9.9)
"이제 우리는 로트렉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다. 이것은 그가 극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이다. 그리고 그의 독립적인 정신에는 어떠한 뿌리 깊은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사상을 경멸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종류의 권위를 거부할 뿐이었다. ………
로트렉은 공원에서 노는 어린아이처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트리스탕 베르나르-
프랑스의 화가. 알비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 R.프랭스토에게 배웠고 1882년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본명 F.A.Piwstre)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 있는 소묘화가(素描畵家)로서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나갔다. 로트렉은 전통적인 화단에서 부각된 화가가 아니다. 기이한 행동과 스캔들, 환락가의 풍경을 그려냈던 그는 ‘퇴폐화가'라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현대의 광고 전단지와 다양한 디자인의 포스터가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로트렉이다. 어떤 유파나 예술 사조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간의 삶을 예술로 녹여 내려는 의지가 확고한 화가였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로트렉은 12세에 당한 추락사고로 키가 152cm에 그쳤다. 곱추를 연상시키는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면서 그림을 배운 뒤 그는 스물 두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난다. 이 무렵 고흐, 고갱 등과 알게 되었고 드가의 예술에 끌리기도 하였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그 후 13년 동안 술집·매음굴·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제작을 하였다.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태양을 찾아 헤맸던 친구 고흐와 달리 앉은뱅이 로트렉은 항상 앉은 채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로트렉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도시의 일상을 그렸다. 타락과 퇴폐, 그리고 이에 대한 폭로. 그래서 로트렉의 작품은 우아하고 경건한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의 세계를 조명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서는 고흐나 고갱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갈등과 좌절 또한 없다. 그는 현실을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적인 갈등과 방황을 일삼았던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비극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예술 세계로 정화시킨 화가였다. 몽마르트의 물랭루즈는 로트렉의 전속 작업장이나 다름없었다.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매춘부와 공연 예술가, 광대 등을 그는 우울한 화폭에 담아 냈다. 물론 그의 삶이 그 환락의 뒷골목에 도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둡고 그늘진 사회의 일면을 냉철하고 이성적인 눈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로트렉의 눈길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적인 입장에서의 비판이었다. 신흥 부르주아 세력에서 밀려난 그의 시선은 언제나 서글픈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인기 배우들의 허식과 무지, 술집 손님들의 성격을 그는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보았다. 로트렉에게 중요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 진실을 행하기 위해 그는 어둠의 시대를 날카롭게 조명했다. 단순한 풍속화가의 차원을 넘어서 그는 화가로서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어떤 유파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개성 있고 독창적인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당대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묘사해 냈다. 살아 있는 삶, 인간의 모습이 그에겐 작품의 주된 소재였다. 하지만 로트렉의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풍자의 비극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실까지도 포용한다. 로트렉은 인간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화가였다. 뒷골목의 추악함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화가 로트렉은 비극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력을 작품에 부여했다. 로트렉은 시대에 부합된 예술사의 주의 주장에 무관심한 작가였다. 또한 예술에 대한 논의나 비평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조형적인 예술 형식의 창조를 위해 대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진지하게 표현해 내기 위해 조형적인 형식미를 창출해 냈다. 현실에 대해 냉철한 직관력을 갖고 있었던 로트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 주력했다. 관찰된 대상은 예술이라는 장르를 핑계삼아 어떤 식으로든 미화되거나 이상화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소재가 일상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작품화했다. 특히 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로트렉은 천재적인 소묘가였다. 물론 그의 데생은 기존의 그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대상이 지닌 본래의 선을 그는 과감하게 과장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신속하게 화면 안에 고정시키는 재능 또한 천부적이었다. 이 같은 재능을 뒷받침 해주는 그의 힘은 정확하고 개성적인 선에 있다. 실루엣으로 표현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까지도 그는 면이 아니라 윤곽선에 의해 드러냈다. 그의 색채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는 기존의 어떤 유파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채색석판화로 만들어진 로트렉의 포스터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 ‘거리의 예술'로 불리고 있는 현대 포스터의 기원을 바로 로트렉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트렉에 의해 포스터는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채색석판화에 대한 관심으로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결국 그에 의해서 예술 작품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밤의 환락가를 그리는 ‘퇴폐적인 화가'라는 불명예가 늘상 수식어처럼 따라다녔지만, 로트렉은 석판화와 디자인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키며 각광받은 화가였다. 30대 이후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99년에는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중에는 물론 퇴원 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말로메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 중 3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어머니는 아틀리에에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전부 챙겨 고향인 알비시(市)에 기증하였고, 1922년 알비시에 로트레크미술관이 개관되었다. 3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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