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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2.16~1944.12.13)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9. 25.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2.16~1944.12.13)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의 화가. 모스크바 출생.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한 사람이며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배웠으나, 1895년 인상파전을 보고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인 1996년 뮌헨으로 옮겨 아즈베와 F.슈투크에게 사사하여 화가로 전향하고 1905년 살롱 도톤의 회원이 되었다. 그 전후에 이탈리아· 튀니지·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1908년 이후 뮌헨·무르나우에 살면서, 19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표현파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예술가집단인 ‘청기사(靑騎士)’를 조직하여(1911), 비구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0년에 그린 [기수]가 제작되던 때를 같이해 수채와에 의한 추상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또한 그 자신의 예술관을 이론적으로 뒷바침 해 줄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란 책을 1912년에 출판한다. 이후 그는 거의 완전한 추상 미술을 하게 되며 추상 미술을 지향했던 것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가치는 가시적인 세계의 재현을 통해서 성취되기 보다는 추상적 구성과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생명력있는 표현성을 특징으로 하는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구체적인 대상을 배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기체를 연상시키며 그가 추구한 것은 회화 그 자체이며 여기서 정신적인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정신적인 세계는 '절대' 혹은 '추상'이라는 성격의 회화를 형성하게 된다.  집단적인 미술운동이 아닌 추상 미술은 단지 비슷한 시기의 사회적 배경이 미술에 반영됐다는 점에서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화가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조끔씩 차이를 보였다. 그 중에서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직감과 심리적인 상태를 중시하는 회화라는 특징이 있다.  어느날 자신의 화실에 들어서던 칸딘스키는 거꾸로 놓여있던 그림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그림이 무엇을 그렸느냐와 관계없이 색채와 선의 구성만으로도 충분한 표현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 칸딘스키의 추상 미술이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깨달음은 구체적인 대상이 완전히 배제된 미술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뒤집어진 그림을 보면서 색채와 선만으로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한 칸딘스키에 의해 발전되어 온 추상화는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지 않는 회화를 뜻한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와 감정도 없어 보이지만, 칸딘스키는 추상화 속에 ‘영혼을 울리는 감동'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으로 느껴지는 내면의 상황, 비록 형태는 없지만 그는 캔버스 위에 피인지 물감인지 구분조차 안되는 불길한 얼룩을 그려 넣기도 하고, 선의 움직임을 통해 격정적이고 흥분된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  특정 대상이나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서 완전히 제거한 칸딘스키는 이 같은 실물 주제의 포기를 정당화하며 회화의 자율성을 부르짖었다. 무형의 주제로부터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하며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칸딘스키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 대신 대상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다. 예를 들어 나무를 보았을 때, 화가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평화라고 가정하자. 이 때 평화스럽다는 내적인 감동을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무라는 구체적인 대상은 없어지고 화가의 감정만이 남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신 사물을 본 그 순간,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 충실했던 화가였던 것이다.  결국 그의 화폭 위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그려지는 대신 자신의 감정만을 색채와 선으로 남긴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대상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화가가 자신의 감정과 정신을 표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화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만을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는 의미 없는 낙서나 얼룩으로 치부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을 파악한 칸딘스키는 색채를 통해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또한 칸딘스키는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했다. 심지어는 “색채는 건반이다. 눈은 망치이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음악이 화음만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색채나 선만으만으로 대상을 표현해 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음악에서 음의 높낮이가 다르고 악기마다 독특한 음색이 있듯이 색에서도 노랑색은 전형적인 지상의 색으로 맹목적인 착란이나 광기 어린 병적인 색으로 나타나며, 파랑색은 전형적인 하늘의 색이며 순수에 대한 동경을 준다는 것 등 각각의 색채마다 느낌이 다름을 연구를 통해 밝혔다. 칸딘스키는 이런 연구를 통해 심지어는 색상으로 보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음악이 화음을 통해 음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듯 회화 역시 서로 다른 색채와 선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체를 통제하는 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하학적이며 단순화 된 표현으로 내적인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절제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의 말년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모든 색채에는 의미가 있듯 이런 형태 또한 아무렇게나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운동감, 균형감각, 무게 등을 나타내면서 제각각 의미 있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 명시되어 있는 <즉흥>, <음향>과 같은 음악적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칸딘스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1918년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이듬해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처음 바이마르, 1925년부터 데사우)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만년에는 1933년부터 프랑스에 정주하여, 여행 이외에는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에 살았으며,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한 적도 있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가을》 《콤포지션 7》 등이 있으며,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21) 《점·선·면》(19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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