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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 Realism)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9. 25.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 Realism)

 

 

 구소련에서 1920년대 말기부터 1930년대 초기에 제창되고 1934년의 소비에트작가동맹 제1회 대회에서 통일적 창작방법으로 확립된 예술의 방법으로 거기서 채택된 규약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에 있어서 올바르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그때 예술적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근로자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과제와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레닌의 반영론은 예술을 통한 사회주의적 전유의 토대가 되었다. 반영론은 예술생산이 사회·경제적 발전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의해 예술작품을 규정했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론을 기초로하여 예술의 기원을 원시사회에서의 실천적인 인간능력과 관련시켜 파악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인식과정의 필연성은 노동과정 자체내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최초의 인식형태 중의 하나는 예술적인 형상을 통해 나타난 세계의 반영이었다. 예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서 미래 지향적, 집단적, 당파적 기능을 수행하는 근본적이로 유용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상부구조의 일부인 예술은 집단적 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 교육을 위한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체제의 계급투쟁의 무기가 되었다. 조형예술도 문학처럼 인간을 정치적·도덕적 그리고 미적으로 교육시킬 과제 즉 사회주의적이면서 집단적으로 지향된 의식을 배양시키고 공산주의 사회 질서로 끌어들일 과제를 안고 있었다.  1920년대 루나차르스키의 자유주의 무노하정책 하에서 사회주의 예술은 진보적 방향의 양식을 형성시킨 반면 1934년 소비에트 문필가 협회의 제1차 연합회의에서 강령으로 확정되었다. 안드레이 샤드노프는 삶을 단순히 객관적인 현실로만 묘사하지 말고, 혁명적인 삶의 전개에서의 현실을 포착해아 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람직한 공산주의 미래를 예견 할 수 있게 하는 예술적 경향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공식화 했다. 스탈린 시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의 엄격한 문화정책에 의한 개인 숭배로 특징지워졌다. 스탈린과 레닌이라는 지도자의 인간성이 지나치리만큼 미화된 형태로 인민들 앞에 회화나 조각으로 제시된 것이다. 자본주의와 파시즘 같은 일체의 현상에 대한 투쟁의 사회정책적 주제, 그리고 집단주의의 천명과 개인적 이기주의 배제 등이 너무 이상화되어 고유한 시대 문제 등에 대해서는 침묵화되어 고유한 시대 문제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직 혁명의 미래상이나 집단의식으로 이뤄진 공동체만이 부각된 정도였다. 사회주의의 영웅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당에 복종하고 사회주의 노동에 열성을 보임으로써 탈개인주의화된 화신인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이와같이 이상 화되고 이데올로기적 전형화로 인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적인 모든 문제를 성실하고 솔직하게 묘사하려는 서구 예술학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현실적인 갈등을 주제로 삼아 고찰하려는 입장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곳곳에서 생겨 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조형예술 분야에서는 1960 년대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변화를 본질적으로 저해하려는 움직임이 다른 세계의 예술사 전개와 동떨어진 곳에서 이뤄졌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이미 1950년대 초 일련의 예술가들이 서구 양식과의 연결을 시도했는데 그 때문에 국외자로 취급받았다. 그와 달리, 동독에 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1970년대 이후 관료적 문화정책에 의해 공식적으로 기꺼이 실험을 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인 테마를 유지하는 한에서 현실주의적인 회화기법의 폭을 넓히고 다양화 시키려 했다.  시민예술의 다양한 품목들로부터 도상들이 결합된 작품들은 마티스와 피카소의 영향을 심화시켰고, 신즉물주의의 거장들을 새롭게 조명하게 했으며, 어떠한 양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구투소처럼 모범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서구의 신사실주의자들의 콜라주 기법을 모방하게 되었던 영웅적인 인간의 표현속에는 르네상스적인 파코스의 특성이 나타났다. 또한 보다 엄격한 개인주의적 표현력으로 초현실주의를 연상시키는 도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온 대표자들로는 무엇보다도 베른하르트 하이지히, 볼프강 마트호이, 빌 지테, 베르너 튀브케르등을 들 수 있다. 전형적인 도상에서 반하는 투쟁적 도상의 새로움은, 마치 현실적인 문제들이 집단적 욕구와 개인적 욕구의 대립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듯이, 현실적인 문제들을 묘사하는 가운데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동북아시아 제국들에서는 낡은 교의 속에 양식이 정체되는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숭고하게 이상화시키는 방향으로 주제가 고정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쿠바나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개별적인 화가들에게서는 오직 향토색이 잩은 국민예술에 전념하는 길만이 독자적으로 양식적인 면에서 관료적인 테마 설정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되었다.  소련 예술은 그들 나름의 사실주의에 기초한 혁명적 선전적 경향을 보였는데, 강렬한 표현성, 관례화 되면서도 때로는 상징적인 면면을 담은 형상들, 압도적일만큼 시적으로 처리된 현실 등의 특징을 노출 하였다. 당시에 그 무엇보다도 현저하게 활동한 단체는 1922년에 창립된 ";혁명 러시아 예술가 연합";으로 이 연합은 ";혁명을 그림으로 재현하고 계급 투쟁과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자";라는 등의 슬로건을 내세움으로서, 현대 러시아 예술 연구가들로 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선구로 인정 받았다. 이후 수차례의 화합을 통해 부르즈와적 반동 성향의 작가들이 비판받고 고르키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공표되며, 그와 유사한 경향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요소가 추출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론적으로 확충 되었다. 1934년 제1차 작가대회가 마련된 작가동맹 정관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혁명적 발전속에 있는 현실을 진실되게,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함을 기본원리로 삼고, 민중의 교육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 예술적 방법이다.";라는 요지로 규정 되었다.  소비에트 일반 예술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미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엄정하게 요구하는 사회주의 윤리에 의해 결정된 미적개념 및 정치적 교육의 일환으로 분류되는 예술의 역할개념으로 인하여 무기력, 편협성, 현대 미술사조와의 결별 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30년 이후 소련의 공식적인 정책은 불모의 관학주의를 예술의 실무에다 재부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정책으로 인해 예술에 대해 창조된 관객의 발전도 막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유럽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미국의 보수적 비평가들의 견해는, 미국이 일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더욱 옹호받고 광범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전쟁 후 미국의 정경을 그린 사실적 회화에서, 그리고 산업화 때문에 사라져가고 있던 것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의 정신과 독립적 자세에 대한 추구였다. 이것은 미술가들이 대중의 감정을 반영하고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대중들은 그림을 환경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으므로, 에이트파가 도시의 정경을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경애로 제시했던 때나 또는 스티글리츠 서클이 미국적 주제를 그들 자신의 개성있는 방법으로 제시했던 때보다, 미술가들이 대중과 더 가까와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미국 경제의 파산과 공황은 사회에 대한 보다 더 집중적인 검진을 요구했다. 토마스 하트 벤톤의 작품과 같은 그림에 주어졌던 이름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단지 당면 문제와만 연관있는 미술 같았다. 뉴딜정책하의 정부는 고용증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세웠으며, 여기에는 미술가들을 위해 공공건물을 장식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직종들이 규모가 크고 요구되는 사회적 주제를 갖고 있었으므로, 작업은 대부분 반복적이고 순응주의적인 것이었다.  또하나의 연방적인 규모의 계획은 그란트 우드가 설명한 분류된 카탈로그 즉 아메리카 디자인 목록으로, 이는 민속미술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술가들은 이러한 작업계획을 통해 처음으로 작업의 한 부분을 담당함으로써 공동사회의 한 부분임을 느끼게 되었다. 1930년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다른 미술 사조들도 계속되었고, 또 그들은 서로 중첩되었다. 추상화가 그 중 하나였는데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아모리 쇼에 이어 그와같은 주장을 펴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데이비스는 애쉬킨파의 한 사람이었으며, 큐비즘을 연구했고 유럽의 미술상을 알고 있었으나, 그이 뿌리는 미국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에 티켓이나 성냥갑 같은 일상생활의 징표나 상징들을 도입했다. 그의 주제는 그 당시의 미국 생활이었으나 그는 뒤에 숨은 생각과 감정에 도달하려고 했으며, 미국의 정경을 단순히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그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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