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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상징주의(象徵主義:Symbolisme)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10. 15.

상징주의(象徵主義:Symbolisme)

 

 

고갱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프랑스 시단(詩檀)에서 일어난 상징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1885년 부터 나타난 화가.조각들의 태도 혹은 다소 느슨하게 조직된 운동의 한 경향.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으며, 쿠르베에 의해 공식화된 '사실주의의 원리'에 반발하였다.
쿠르베가 세운 원칙은 그의 말 - "회화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추상적 대상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에 잘 나타나있는데 이러한 회화 이념에 대한 반발로 시인 장 모레 아스는 《피가로》지 1886년 9월 18일자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상징주의의 목적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시적 언어를 내면생활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겼으므로 화가들에게도 신비와 마술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상징주의의 이론적 기반은 고갱 후원자 모임의 열광적인 회원이었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에 의해 1891년 3월《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에 발표된 논문 회화에 있어서 상징주의 에 의해 기초되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예술 작품을
① 사상이 있어야 한다.
② 예술은 사상을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상징적이어야 한다.
③ 예술은 일반적인 이해를 위한 양식으로 여러 형태와 기호를 제세하므로 종합적이어야 한다.
④ 예술이 묘사하는 대상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인지된 사상의 표지이므로 주관적이어야 한다.
⑤ 그러므로 예술은 결과적으로 장식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장식적인 그림이란 동시에 주관적· 종합적·상징적 사상적인 표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라고 썼다.
'종합적'이란 말은 종종 회화의 상징주의 운동과 시의 상징주의 운동을 구별 하기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적어도 어느 부분은 상징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나비파 화가들의 작품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나비파는 《상 징주의로서의 세잔느》(1907)를 쓴 이론가 모리스 드니에 의해 상징주의자들로 간주되었었다. 그는 상징주의에 대해 "본래 신비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운동은 아니다. 이것은 풍경화가와 정물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 영혼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은 역시 아니다. 표현된 주체가 우리의 정신상태를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가 최초의 감각을 전달하고 감정을 영속시킨다. 모든 예술작품은 어떤 경험된 감각의 혹은 더 빈번하게는 심리적 사실의 전위, 열정적인 등가물, 희화이다."라고 말했다.
 상징주의와 상징주의자들의 예술에 대한 개관은 여러 간행물을 통해 출판되었다. 《데카당》,《보규》,《상징주의자》가 1886년,《메루퀴르 드 프랑스》가 1891년에 출판되었다. 상징주의적 태도를 명백하게 드러냈던 화가로는 다음과 잩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샤반느는 '명료한 사상 각각에는 그것을 번역하게 하는 시각적 사고가 각각 따른다' 고 믿었다. 르동은 모리스 드니에 의해 '회화의 말라르메' 라고 불리었는에 자신의 목적을 '인간의 감성을 아라베스크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화가 모로는 마티스, 루오, 다른 야수파 작가들의 스승이었다.  카리에르는 몽환적·문학적 내용을 무채색조로 그린 화가였다. 상징주의자 들은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예술적 형식보다는 시적 사상의 표현, 마술(신비), 혹은 종교애호주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절충주의 혹은 개인주의자들이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자연의 외적인 모습을 모방하기보다는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상징파는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일어났고,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主觀的情緖)의 시적 정착(詩的定着)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서양미술에서의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실증적 표현에 대한 대립 및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형상화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내면(內面), 관념 등을 상징·우의(寓意)·표징 등의 수법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하였다.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P.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다. 나비파(派)의 M.드니도 상징파로 자처했으며 그들은 생(生)·사(死)·불안·사랑·성(性)·꿈·환상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체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다. 19세기 상징주의는 주제적·문학적 측면과 서로 대립된 순수조형적 구성이라는 관념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세기말(世紀末)’ ‘아르 누보’와 복합되면서 널리 파급되었다.
상징주의의 명작으로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1897), G.클림트의 《물뱀》, F.호들러의 《밤》, E.뭉크의 《절규》 등이 있다. 이 밖에 P.퓌비 드 샤반, O.르동, 벨기에의 장미십자그룹, 러시아의 파란장미그룹, 영국의 라파엘전파(前派)의 후기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런 경향은 191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20세기 초 포비슴과 큐비즘의 출현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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