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미·후·촉각 모였는데…
오감도
욕망과 도덕, 경계선 근처에서 공존
한쪽 구석엔 ‘감각의 허무함’ 똬리
≫ 보갱 <오감> 1630, 나무에 유채, 55x73cm, 루브르 박물관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란 감각기관이 발달한 사람, 예리하고 활동적인 감각기관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심리학자 조앤 에릭슨은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리한 감각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발달한 감각이야말로 세계의 본질적인 관계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통로이며, 무엇을 감각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보편의 언어, 곧 어느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천부적인 창조성의 언어, 위대한 예술과 기술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말과 같다”고 주장했다.
창의력과 감성을 중시하는 오늘날 감각을 고도화하는 일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런 시각과는 달리, 시대와 문명에 따라 감각 혹은 감각을 추구하는 일은 육체의 욕망을 반영하는 천한 것, 가벼운 것, 무의미한 것으로 폄하되곤 했다. 감각을 추구하는 것은 욕망의 늪에 빠지는 것이며, 무언가를 감각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요구되는 만큼의 충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 표피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감각과 밀접한 예술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때로 잡기나 비생산적인 놀음, 무익하고 불요불급한 행위로 취급받았다. 어느 문명의 미술보다 물리적인 사실 표현을 중시한 서양 미술은 그만큼 감각적인 묘사를 발달시켰고, 이로 인해 교회와 갈등을 빚거나, 외설 논쟁에 빈번히 휘말리곤 했다.
이런 사실주의 전통, 감각을 중시하는 전통으로부터 나온 근대 초기 서양 회화의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가 ‘오감도’다. 오감도는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곧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을 한 그림 혹은 연작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감각을 주제로 하여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회화인 만큼 탁월한 감각성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의 도덕관을 의식해 감각적·세속적 즐거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묘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이행기 유럽의 긴장과 갈등을 잘 느낄 수 있는 그림인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오감도는 루뱅 보갱의 <오감>이다. 테이블 위에 악보와 류트, 트럼프, 돈주머니, 타원형 진주, 와인, 빵, 체스 판, 카네이션 꽃병, 거울이 놓여 있다. 여러 개의 사물을 그렸지만, 카네이션을 빼고는 모두 하나씩만 그려져 있어 그다지 복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 카라바조 <류트 연주자> 1595년경, 유화, 94x119cm,
에르미타슈 박물관
그려진 사물은 각각 인간의 오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타낸다. 악보와 류트는 청각, 트럼프와 돈주머니, 진주, 체스 판은 촉각, 와인과 빵은 미각, 카네이션은 후각, 그리고 거울은 시각을 상징한다.
오감을 상징물로 나타낸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그림이지만, 거울에 이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아니, 거울이 왜 저리도 어두울까? 앞에 사물이 많이 늘어섰는데도 하나도 비치는 게 없다. 보갱은 왜 비치지 않는 거울을 그렸을까? 바로 감각의 찰나성과 허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감각적 경험이란 거울의 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이에 의지해 사는 육체도 순간을 살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메시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와인과 빵도 다시 보게 된다. 포도주와 빵은 예수의 피와 살 혹은 영성체(성찬식)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모티프다. 그 곁의 카네이션은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는 바로크시대의 상징이다. 세 송이가 꽂혀 있으니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모두 성(聖)과 관련된 것들이다.
반면 테이블 앞쪽에 늘어선 악보와 류트, 카드, 돈주머니, 진주, 체스 판은 속(俗)과 관련된 이미지들이다. 순간의 즐거움, 육체의 욕망과 긴밀히 이어져 있는 것들이다. 화가는 묻는다. 눈앞의 욕망을 택할 것인가, 그 뒤의 거룩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류트는 엎어져 있고, 돈주머니는 닫혀 있다. 트럼프는 앞면이 위로 놓여 있고, 체스 판은 잠겨 있다. 놀이도, 유흥도, 도박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지금 선택의 기회가 있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할까 망설이고 있다면, 화가의 원근법에 좀더 주목해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체스 판과 거울에 작용하는 원근법을 보면 코앞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사물치고는 뒤로 줄어드는 각이 상당히 좁다. 그 줄어드는 끝에 있을 소실점이 금세 보일 것만 같다. 이는 일종의 화살표를 연상시킨다. 뒤의 것, 곧 거룩한 것을 택하라는 화가의 강력한 요청이 담긴 표현인 것이다.
이런 정물화 형식이 아니라 인물화 형식으로, 인물과 주변 소품을 오감과 관련된 것으로 그려 넣어 오감도를 만든 작품도 있다. 바로크회화의 대가 카라바조가 그린 <류트 연주자>가 그 그림이다. 빛을 받아 또렷이 부각된 연주자를 중심으로 꽃, 과일, 악기 등이 동원됐다. 역시 꽃은 후각, 과일은 미각, 바이올린 등 악기는 청각, 음표가 선명하게 그려진 악보는 (청각과 함께) 시각을 나타낸다. 그럼 촉각은 무엇으로 나타냈는가? 바로 그림의 핍진성이다. 이차원 평면 위에 그렸지만, 삼차원 입체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사물의 질감이 사실 그대로 느껴질 것 같다. 이처럼 핍진한 표현으로 촉각성을 살린 화가는 아마 속으로 “세상에 나만큼 그리는 화가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을지 모른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림의 바이올린 현 하나가 끊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꽃이 곧 시들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젊은이의 저 팽팽한 얼굴에 곧 주름이 질 것이라는 사실과 이어져 이 ‘감각세상’의 무상함을 상기시킨다.
두 그림 모두 이렇듯 육체와 감각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물 묘사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보는 이는 아무래도 그 주제보다 감각적인 묘사에 더 빠져들게 된다. 주제와 형식의 이런 갈등으로 인해 오감도에는 항상 긴장이 발생하는데,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행기 유럽의 의식 충돌 현상이 반영된 탓이 크다 하겠다.
오감 주제의 그림이 부쩍 그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 말~17세기다. 이 시기 유럽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경제로부터 왔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근대 초기 유럽의 상공업은 자본주의와 중상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두 체제의 병진(竝進)으로 유럽 문명은 폐쇄적인 길드 경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업과 무역 분야에서 혁명적인 발전과 팽창을 이룰 수 있었다. 주기적인 식량위기가 완화되고, 식민지로부터 각종 특산물이 흘러들어오는 등 물질에 대한 유럽인들의 감각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사치품에 대한 욕구가 치솟았고, 감각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 시기 누드화에서 남성 누드에 비해 여성 누드가 부쩍 늘어난 것도 그렇지만, 여성 누드에서 이른바 글래머 스타일의 풍만한 여성상, 그러니까 물신적인 관능의 이미지가 대표적인 미인상으로 부상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런 반면, 여전히 위력적인 기독교의 도덕관과 새로이 성장하는 중산층의 엄격하고 합리적인 가치관은 물질과 감각이 지닌 필멸성과 찰나성을 자꾸 환기시켰다. ‘경계 위의 그림’ 오감도에 그 긴장과 갈등이 담기지 않을 수 없었다. 욕망과 도덕의 기묘한 공존이 낳은 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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