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Avant-Garde)
아방가르드의 기원
예술이 시대를 앞서간다는 생각은 19세기 이후 예술가들의 세계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널리 유포된 일종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에 부여된 명칭이 ''아방가르드''이며, 적어도 지난 세기동안 이 용어는 예술가들의 자율적 활동을 강화하는 가장 혁신적인 이념이었다. 전통의 권위에 대한 강력한 반항과 거부감을 바탕으로 한 아방가르드의 이념은 "파괴하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쿠닌(M.Bakunin)의 무정부주의적 공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즉, 파괴에 의한 창조는 모두 반전통적이고 극단적인 운동을 포괄하는 하나의 개념영역으로서 아방가르드의 활동을 요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문학·예술·종교 등에서 자기의식적으로 앞선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도입된 아방가르드란 용어는 이미 중세시대부터 사용되었으나 이 말이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다는 의미에서 일관성있게 사용된 것은 근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란 용어가 최초로 공개적으로 사용된 경우를 보면 프랑스 혁명의 전투적 열기에서 1794년 경에 생겨난 간행물 즉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일종의 상징처럼 새겨 놓은 ''동부 피레네 산맥의 전위부대(L''Avant-garde de l''armee des Pyrenees orientals)에서 최초로 이말을 잡지 제목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란 개념은 그 본래의 의미를 전투적인 비유에서 이끌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평론가인 생 시몽(Saint Simon)이 사회를 개혁하고, 억압받는 서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사회와 과학예술의 총체적 노력에서 예리한 칼날과 같은 예술의 역할을 비유해 처음 인용하였다. 1790년대 이후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사상에 있어서 혁명적, 미래지향적, 유토피아적 사상, 태도, 경향에 대한 은유로서 빈번하게 등장하였으며, 특히 1830년 경 프랑스에서 에밀 바로(Emile Barr-ault)와 같은 생시몽주의자들에 의해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정치적 의식과 입장을 표방하는 용어가 되었다. 즉, 아방가르드는 정치에서 아나키의 특성을내포하고 미술에서는 새로운 것을 실험하며 끊임없이 전통미술에 반발하고 혁명의 깃발을 들고 앞에 달려가는 미래의 뱅가디즘 즉 진보의 미술을 뜻한다.
그 후 아방가르드는 라베르당(Gabriel-Desire Laverdant)에 의해 분명하게 미학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사용되었다.
아방가르드(시민사회에 있어서 예술의 자율성의 문제)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들을 통해 사회적 부분체계로서의 예술은 자기비판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다다이즘은 그 이전의 예술적 조류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발전되어온 제도예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게 된다. 여기서 제도예술이라는 개념은 예술을 생산해내고 분배하는 장치뿐만 아니라 어느 일정한 시대에 있어서 예술에 대해 지배적인 생각들, 작품의 수용을 본질적으로 결정짓는 그러한 생각들까지도 포함하여 지칭한다. 아방가르드는 그 둘 모두에 대해서, 또한 자율성의 개념으로 기술되는 시민사회에 있어서의 예술의 상태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다. 유미주의의 예술의 상태에 대해서도 등을 돌린다. 유미주의에서 예술의 실제생활적 관계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나온 연후에 한편으로는 비로소 미적인 것이 ''순수하게'' 전개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성의 또다른 한면인 사회적 무용성(無用性)이 인식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을 실제생활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아방가르드적 저항을 통해 자율성과 무용성 사이의 연관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로써 시작된 사회의 부분체계로서의 예술의 자기비판은 지나간 예술단계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가능케 해준다. 이를테면 사실주의 시대에는 예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묘사작업을 더욱 더 현실에 접근시킨다는 관점 아래에서 해석되었던데 반해 이제 이러한 해석은 일면적인 것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예술이 모든 실제생활과의 연관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분리되어 나온 연후에 비로소 두가지 사실의 부르조아 사회에서의 예술의 발전원리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하나는 예술이 점진적으로 실제 삶의 문맥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특수한 체험 영역, 즉 미적인 것이 분화되는 것이다.
자기비판이 가능하기 위한 역사적 조건들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아무런 직접적인 답변도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그의 텍스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자기비판은 이 비판이 겨냥하는 사회구성체 내지 사회적 부분체계가 충분히 분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단어일 뿐이다. 시민사회의 자기비판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탄생이 전제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탄생함으로써 자유주의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른바 자기비판은 실천적으로 수행할 것이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들의 공적이다.
자율성이라는 범주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그 까닭은 자율적 예술작품이라는 개념속에서 통일체로서 여겨졌던 여러 하위 범주들이 아직 확실하게 해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개의 하위 범주들이 전혀 동시적으로 발전되어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는 이미 궁정예술이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 어떤 때에는 시민예술이 비로소 자율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1 ) 예배적예술(보기:중세 전성기의 예술)은 예배의 대상으로 쓰인다. 예배적 예술은 종교라는 사회적 제도 속에 완전히 편입된다. 생산은 수공업적·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수용방식도 역시 집단적 방식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2 ) 궁정예술(보기:루이14세 때의 궁정예술)도 역시 엄밀하게 규정된 사용 목적을 지니고 있다. 즉 궁정예술은 위신을 대변하는 대상으로서 영주들의 명예나 궁정사회의 자기표현을 위해 쓰인다. 예배적 예술이 성직자들의 실제생활의 일부였던 것처럼 궁정예술도 역시 궁정사회의 실제생활의 일부였다. 궁정예술이 예배적 예술과 다른점은 특히 생산의 영역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다시 말해 예술가가 개인으로서 생산활동을 하며 자신의 활동의 개별성에 대한 의식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에 반해 수용은 여전히 집단적인 성격을 띤다. 그렇지만 모임의 내용은 더 이상 어떤 예배적인 것이 아니라 사교(社交)적이다.
3 ) 시민예술은 단지 시민계급이 귀족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넘겨받는 한에 있어서만 위신을 대변하는 기능을 갖는다. 시민예술이 진정으로 시민적이라면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자기이해를 객관화한 표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에서 분명하게 표현된 이러한 자기이해의 생산과 수용은 더이상 실제생활과 결부되지 않는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잔여 욕구들, 즉 시민사회의 실제생활에서 밀려나버린 욕구들의 만족이라고 불렀다. 시민예술에 이르러서는 생산뿐만 아니라 수용도 개인적으로 이루어 진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들은 시민사회에서의 예술의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여기서 이전의 예술의 특성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제생활로부터 유리된 것으로서의 제도예술이 부정된다. 전위주의자들이 예술은 다시 실천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한다고 할 때, 이때의 요구는 특수한 예술적 내용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영향을 결정짓는 요소인, 사회 내에서의 예술적 기능방식을 겨냥한 요구이다. 전위주의자들이 의도하는 것은 예술은 바로 그러한 실제생활 속으로 통합시키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전위주의자들은 유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합목적적으로 조직된 세계에 대하여 거부했던 것이다. 전위주의자들이 유미주의자들과 다른점은, 그들은 예술로부터 새로운 실제생활을 조직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유미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의도에 대한 필수적 선행 조건임이 판명되고 있다. 개별적 작품의 내용들에 있어서까지 전적으로 기존 사회의 실제생활로부터 분리된 예술만이 새로운 실제생활로 조직되어 나갈 수 있는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가장 극단적인 표명들을 통해서일지라도 그러한 개인적 성격에 대하여 창작의 주체로서 집단을 대립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인적 생산이라는 범주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일로써 맞선다. 뒤샹이 1913년에 대량 생산된 오브제(변기,병건조대)에 서명을 하고 그것들을 미술전시회에 보냈을 때, 이로써 개인적 생산이라는 범주는 부정된 셈이 되었다. 뒤샹의 도전은 서명된 작품의 질보다는 서명 자체가 더 중시되는 예술품시장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을 예술작품의 창조자로 여기는 시민사회에서의 예술의 원칙 자체도 철저히 문제삼는다. 뒤샹의 기성품들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선언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은 자율적 예술의 본질적 규정들, 그러니까 실제생활로부터 예술이 유리된 점, 개인적 생산 및 이로부터 분리된 개인적 수용 등을 부정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실제생활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율적 예술을 지양하려고 한다. 이러한 지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자율적 예술을 그릇되게 지양하는 형태라면 몰라도 시민사회 내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그릇된 지양 형태가 존재한다는 점은 오락 문학과 상품 미학이 입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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