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비즘 (Cubism)
큐비즘은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미술운동으로서 1908년 브라크(Georges Braque)가 그린 <에스타크의 집> 연작에 대해 마티스(Henri Matisse)가 "조그만 입체들의 덩어리"라고 평한 것에서 그 용어가 유래했다.
입체주의를 시기별로 분석적·종합적 큐비즘으로 나눈 것은 이 운동에 참가했던 후앙 그리(Juan Gris)였다.
큐비즘의 전개과정
1) Cezanne풍의 입체주의(1907∼1909)
▷ 1904년 파리에서 세잔느(P. Cezanne)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을 당시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비슷한 시기에 열린 Gogh, Gauguin의 전시는 젊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착상을 시도하도록 고취시켰다. 특히 "모든 자연을 원추, 원통, 구(球)의 형태로 취급한다"는 Cezanne의 말은 입체주의 화가들의 계시가 되었고, Cezanne의 작품과 흑인조각은 이 운동의 초기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입체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한 순간적인 현실 묘사(재현)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主情的) 방법을 폐기한 대신 시점을 복수화하여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tableau로 構築的으로 재구성(분석적 입체주의에서 대상을 극단적으로 분할하는 양상으로 발전)
▷ 1907년 P. Picasso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G. Braque의 <에스타크의 집>으로부터 Cubism 시작하였으나 cubism의 원형을 제시한 작가는 Picasso
▷ 오늘날 우리가 cubism의 첫 단계라 보고 있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Picasso와 Braque는 여전히 Cezanne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자신들의 양식을 찾아나감.
<아비뇽의 처녀들>
다양한 각도에서 본 5명의 여체를 여러 측면들로 재구성
처음에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등장했으나 Picasso는 곧 지워버리고 누드 여성만 배치 왜곡된 형태들은 거의 완전히 평면화되어 있으며, 인물들 사이의 거리와 공간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여 르네상스 원근법으로부터 탈피 -이집트 미술에서 볼 수 있는 단순화된 표현방식 수용
이 작품에는 고갱의 상징적 색채, 날카롭고 길게 늘어난 형태와 거칠고 흰 고명도의 색채에는 엘 그레코의 영향, 그리스 도기화(陶器畵), 그리고 이베리아 조각의 관례적인 안면 표현양식을 참고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① Cezanne적 특징 : 나체와 부분적으로 천을 걸친 여성의 구성방식은 Cezanne의 작품에서 나타나며, 오른쪽 하단의 쭈그리고 있는 여성은 Matisse가 소장하고 있던 Cezanne의 작은 그림으로부터 영향받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② 오른쪽 화면의 두 여성의 야만스럽게 왜곡된 얼굴은 아프리카 조각의 충격을 반영
-아프리카 조각가들은 표현하고자 한 주제에 대해 서구 작가들보다 개념적 방법으로 접근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추상적이고 양식화된 형태로 나타났던 까닭에 Picasso는 재현적이면서 동시에 반자연주의적 예술이 아프리카 조각임을 깨달았으며, 수많은 아프리카 미술가들이 몸체와 두상을 합리적이고 때로는 기하학적으로 해체하는 것이 자기의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재평가의 출발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이 작품은 젊은 시절 성병을 앓았던 피카소의 여성에 대한 이중적 가치관(성적 추구와 공포)를 드러낸다. 여성은 그가 줄기차게 갈망했던 대상임과 아울러 그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운명의 여성(femme fatale)임을 그는 이렇듯 성적 관심을 불어일으키는 나체와 그에 대비되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2) 분석적 입체주의(1910∼1912)
▷ 열렬한 협동의 시기로 정물화가 주종을 이루게 됨
▷ 일상생활의 여러 잡동사니 -악기, 굽 달린 잔, 부채, 신문, 문자 등 화면에 도입하여 사물의 실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함.
▷ 이 시기에 Braque는 "picasso와 나는 매우 가깝게 지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생각에 이끌려 갔다. Picasso는 스페인 사람이었고, 나는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어떤 차이를 말하는지 잘 알겠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러한 차이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몽마르트에 살았고 매일 만나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던 것들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마치 하나의 로프에 묶여진 두 사람의 등산가와도 같았다."고 함.
▷ Brauqe는 분석적 시기의 작업에 나타난 파편화 현상에 대해
"회화가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대상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한 방법이다. 파편화를 통하여 나는 공간과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확립할 수 있었고 공간을 창조하기 전에는 대상을 들여올 수 없었다"고 진술
▷ 분석적 시기에 Picasso와 Braque는 개인적 감성이나 해석을 억제하고 보다 본질적인 구조에 가까워지기 위해 객관성 유지하려 노력. 그래서 서명이 없으면 누구 작품인지 애매
1912-13년 사이 피카소는 그림 속의 정물을 절대적인 이차원성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실험에 몰두하였는데 그 결과 나타난 것이 <기타>와 같은 작품이다. 함석, 철사 등으로 구성한 <기타>는 조각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회화의 연장에 있는 부조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걸려있는 벽면만큼이나 정적이며 부동적 특성을 드러낸다.(이런 점은 큐비즘의 영향과 함께 자신들의 미래주의 원칙에 따라 보치오니가 1912년에 제작한 <공간 속의 병의 전개>란 작품이 지닌 고정된 시점을 극복하기 위한 개념적 수단과 비교해 보면 명확해진다.)
피카소의 작품에서는 물질적 재료와 묘사적 요소가 한 작품에 나란히 병치되고 있으므로 표면 너머에 있는 종합의 계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즉, 작품에 지각적 사실을 초월하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적 능력으로 포착하는 개념적 핵심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1912년에서 1915년 사이에 만들어진 입체주의 부조의 기반이 된 독특한 원리는 로댕의 <지옥의 문>과 유사하다. 즉 외부대상에 대한 부분적 경험은 이미 그 자체로 전체적 인지를 내포한 것이며 의미 자체도 그 대상과 동시에 표면화된다는 것이다.
한편 피카소의 <기타>는 1913년 파리를 방문한 러시아의 젊은 예술가 타틀린(Vladimir Tatlin)에게 영향을 미쳐 러시아로 돌아간 타틀린이 1915년 <역부조>(Counter-relief)를 제작하도록 만들었다.
3) 종합적 입체주의(1913∼1914)
▷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Braque와 Picasso의 차별성이 모호해지자 종합적 입체주의로 선회
▷ 1912년 중대 전환기 맞이함. 이즈음 Picasso와 Braque는 공간의 상호관계 추구와 구조적으로 지나치게 세부적으로 분석된 회화는 자신들의 본래 의도인 객관적인 사실의 추구와 너무 멀다고 판단하였고 금욕적 색채사용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견 교환
▷ 새로운 해결책으로 화면에 물감 이외의 신문지, 벽지, 천 등의 이물질을 도입하는 collage 실험
Collage : 기존의 화면과 조화가 되지 않는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써 화면에 양식적인 분열을 일으키는 것. 이질적 재료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질적 양식 의미
Papier colle : 종이를 풀로 화면에 붙일 때 기존의 화면 양식과 조화를 이루는 기법
▷ 1912년 Brque의 결혼과 Picasso 새 애인 에바와 가까워지면서 두 사람 소원
▷ 1914년에는 두 사람의 작품이 다시 질감의 다양성과 표면의 장식효과를 강조하는 공통점을 보여주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발발로 프랑스인인 Brque는 징집되고 Picasso는 파리에 남게되자 역사적 의미에서의 Cubism은 종결
Pablo Picasso
○ 1881년 Spain의 말라가에서 태어난 Picasso는 자유시장경제가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밀려나고 있던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냄으로써 이러한 사회조건의 변화상황이 그의 작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 보수적인 것과 혁신적인 것 사이에서 갈등
-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낳은 의식의 분열
- 긴박성의 고조, 모순의 극대화, 포괄적 규범에의 요구
결과적으로 이러한 양상이 그로 하여금 죽음의 재현과 특정주제의 반복으로 내몰았다. 즉 자유경쟁 체제로부터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애용과 형식, 개인주의적 성향과 집단주의적 성향을 어떻게 종합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만듦
세잔느는 미래를 예리하게 내다본 자신의 작품 일부에서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자율적 결합을 통한 변증법적 방식을 따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나 여전히 관념론적 Realism에 머문 한계
그 결과 Courbet의 유물론과 Cezanne의 변증법은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이어오며 그 둘의 결합을 역사적 과제로 남겨졌으나 Picasso는 이 양자 모두가 결여된 상태
단지 Picasso란 명성에 부하된 신화만 남발
○ 돈의 필요성을 초월-무엇이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된다.
-그의 작품은 즉시 고액으로 환전가능 : 마이더스의 손
○ Picasso의 이름은 ''정력''의 상징
○ 그가 예술가로서 일관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는 1907-1914년으로 제한적
○ 초기 파리생활은 우울하고 고독했지만 그 고립감 때문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 1907년 Georges Braque와 만나면서 Cubism의 역사 시작
○ 물론 그 이전에 Max Jacop, Guillaume Apollinaire 등과 교류했는데 이들 시인으로부터 Cubism에 대한 Picasso 자신의 자신감 유지 가능
○ 1907년부터 1914년까지 Cubism이 Picasso를 변형시켰다. 다시 말해 Paris와 Europe이 그를 바꾸어 놓았다.
○ Picasso 예술의 변화 단계
1) 感傷(Sentimentality)의 시기
① 靑色時代(1901-1904)
② 장미시대(1905-1906)
※ 주제의 내용과 정신적 구상이 우세
그의 변함없는 주제와 소재는 맹인, 반신불수, 난쟁이, 곡예사, 정신박약아, 빈민, 거지, 어릿광대, 창녀, 줄타는 무희, 점쟁이, 유랑악사, 마술사 등 주로 자연과 사회의 주변부 인물. 그러나 이것을 통한 사회비판과 비슷한 어떤 것 즉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어떤 종류의 비평적 태도를 발견할 수는 없음.
R. M. Rilke와 흡사하게 Picasso는 빈곤을 영웅적인 것으로 여겨 그것을 神話化 즉, 빈곤을 타개해야 할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프란체스코적 미덕(청빈)으로 치부
결국 그의 감상주의는 그의 신비주의와 더불어 세계를 情態的으로 파악하는 한계
2) 創造의 시기
① Cubism 시기(1907-1914)
② 추상과 고전주의 시기(1915-1925)
③ 초현실주의 시기(1925-1920년대 말)
피카소에게 있어서 창조의 시기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1930년대 위대한 작품은 1937년 프랑코의 요청을 받은 독일 폭격기에 의한 융단폭격으로 초토화된 바스크 사람들이 거주하던 도시 게르니카카의 참상을 표현한 <게르니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비록 전쟁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대전의 참상에 대한 그 어떤 내용도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피카소의 딜레마였다. 즉 그는 입체파 시기에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3) 반복·재탕·자기모방의 시기(1940년대 중반 이후)
1945년 이후 피카소의 작품은 자기모방의 단계로 접어든다.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절충주의적 방법으로 작업해 왔던 피카소는 자신에게 가해오는 명성에 걸맞는 새로운 양식의 창조보다 자신의 젊은 시절과 미술사 속을 들락거리거나(이를테면 벨라스케스나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입체주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도자기, 판화, 조각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자전적이고 개인사적인 내용은 물론 자아도취에 가까운 자기탐닉에 몰입하였던 것이다.
George Braque
○ Picasso에 비해 Braque의 방법은 보다 회화적이고 詩的인 것이 특징
○ Braque는 Raul Dufy 등의 Fauvisme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원색의 야수파적 그림을 그렸으나, Picasso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받은 충격으로 입체주의적 방법 추구
○ Cezanne의 ''원통·원추·구''의 이론을 작품 속에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작가는 Braque
○ 1908년 여름 Braque는 Cezanne이 즐겨 찾았던 에스타크로 여행하여 수 점의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고 그것을 칸바일러의 화랑에서 전시하면서 입체주의란 이름이 만들어졌다.
<에스타크의 집>
주된 집착의 대상은 공간
"자연에는 촉감적인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을 나는 ''구성적 공간''이라 묘사하고 싶다." "내게 가장 매력적인 것, 그리고 입체파를 이끌어간 원리는 내가 느꼈던 새로운 공간을 실체화하는 것이었다."
환영주의적 공간(르네상스적 원근법)개념을 폐기함으로써 대상과 주변의 공간은 그림의 표면을 향해 앞으로 전개되는 양상 보여줌
-밀집된 붓터치, 하늘은 없어지고 압축적 공간에 의해 화면공간은 건조한 입방체들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구조로 재구성
Matisse, Rouault 등이 심사위원이었던 Salon d''automne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여 칸바일러 화랑에서 전시
미술평론가 복셀르는 Brauqe에 대해 "매우 대단한 젊은이다. Picasso와 Derain의 어리둥절한 선례가 그를 대담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 인물, 집 모든 것들을 기하학적 체계, cube로 단순화하려 했다"고 평
Cubism의 중요성
시각예술에 있어서 초기 Renaissance에 일어났던 만큼이나 거대한 혁명
즉, 그려진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성격을 변화시켜놓음
주관성의 최대한 배제되고 물체와 실재의 결이 생생하게 강조됨
※ Cubism에 있어서 현대성
1. 주제 선택 : 현대도시의 일상생활에서 취해짐
Cubist들은 자연적인 "구경거리들", 세느강, 공원, 정원 등을 그린 Impressionist들과는 달리 산업사회의 값싼 소지품 예컨대 재떨이, Cafe의 탁자, 값싼 의자, coffee잔, 신문, 유리물병, 세면대, 편지 등의 평범성을 강조.
이 물건들의 평범성은 새로운 것이고, 대량생산의 결과. 곧 제조된 것의 가치를 찬양함
2. 사용재료에 있어서 종이·잉크·캔버스·물감 외에 cubist들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재료 도입
스탠슬기법을 사용해 문자·숫자 만들어내고, 캔버스에 종이조각, 기름헝겊, 마분지, 함석 따위 붙임
collage 및 특별한 질감 위해 모래·톱밥 등 사용한 행위는 예술을 어떤 소중하고 가치있는 보석처럼 여기는 부르주아적 예술관 전체에 이의제기를 하는 것
그러나 오늘날 Ingres의 작품과 Cubist들의 작품은 나란히 미술관에 진열되고 있다.
3. 보는 방법에 있어서 Cubist들은 그들이 그리고 있는 것의 물리적 현존을 확립하고자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측면에서 Courbet의 계승자
Courbet는 미술의 성 토마스와 같은 존재 즉, 실재에 대해 감각적으로 확인할 때까지 의심했던 토마스의 태도를 Courbet에게서 볼 수 있으며 그런 점이 Cubism에도 나타남 - cubism의 Reality.
참고문헌
Rosalind E. Krausse, 『현대조각사의 흐름』, 윤난지 옮김, 도서출판 예경, 1997
Herbert Read, 『서양 현대조각의 역사』, 김성회 옮김, 시공사, 1999.
Nobert Lynton, 『20세기의 미술』, 윤난지 옮김, 도서출판 예경, 1993
John Berger,『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김윤수 옮김, 미진사, 1989.
막스 라파엘,『프루동 마르크스 피카소』, 편집부 옮김, 눈빛, 1991.
출처 : http://plaza1.snut.ac.kr/~ctman 최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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