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미술(Gothic Art)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기에 그 싹이 터서 13세기에 프랑스·영국에서 명확한 양식이 확립되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서유럽 전체에 전파되어 더욱 발전·변화해서, 15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르네상스 미술이 대표하는 근세미술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고딕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이 중세건축을 조야(粗野)한 만족(蠻族) 고트인(Goth 人)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19세기 이래 서유럽 중세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상(美術史上)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세미술에 명확한 형식을 부여한 것은 북프랑스였지만, 결국 전 서유럽적(的)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고트인들은 이 미술의 형성에는 직접 관계가 없었지만, 약간 모멸적인 뜻으로 말한 것이 이러한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딕 미술의 양식은 먼저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실현되었지만, 여기에 어울려서 형성된 조각· 회화·공예에 대해서도 총괄적으로 이 양식의 명칭이 적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고딕 미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도 특징할 만하다.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아미앵 성당,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한 샤르트르 성당, 노트르담 성당, 랭스 성당, 퀼른 성당,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대표적이다. 1140년에 세운 생 드니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은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 추정된다. 그 외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는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과 브르주, 라용 등이 있다. 생 드니는 고딕 성당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서쪽 정면은 장미창이, 서쪽 현관에는 신학의 교과 과정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미엥 역시 순수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기둥은 네 부분으로 된 궁륭의 리브들과 연결되고 성가대석 주위의 회랑은 측랑과 이어지며 세 개의 입구가 있는 서쪽 정면은 네이브와 측랑의 윤곽을 반영한다. 영국에서 이러한 양상은 캔터베리 성당 성가대석에서 보여진다. 13세기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교구교회, 가정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건축은 고딕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전형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렝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초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그 작품들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 짓는데, 여기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조각의 육중한 엄격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친밀한 것으로 발전하는데 비례는 과장되고, 감정은 강조되며, 콜로뉴 대성당 성가대석의 사도 인물상에서처럼 주름장식이 인체를 감싼다. 고딕 건축의 시초로 보는 12세기에 회화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상 벽 공간이 점차로 제거된 것은 회화를 위한 공간이 없는데서 연유한다. 그 대신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이 디자인과 색채계를 표현하였다. 고전적인 주름, 고딕적 흔들림과 같은 필사본의 서정적 세련성등은 전형적이고 새로운 특징으로 간주된다. 하인리히 폰 펠텍케의 「에나이트」, 브누아 드 쌩모아레의 「트로이 로맨스」 등을 들 수 있다. 또 14세기에 둣치오의 「시에나성당 마에스타」에서 패널화가 일반화되었다. 14세기초 지오토로 시작하여 15세기말 로지에 반데르 바이덴이나 보티첼리로 회화의 발전은 집약되고 그 특징은 양식화, 선적인 특질, 고딕식 흔들림이라 할 수 있다.
【조각】 고딕의 성당은 ‘돌의 성서’라고 할 만큼 수많은 조상군(彫像群)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들은 주로 성당의 정면·입구 및 문 위의 팀파눔(tympanum), 그것을 둘러싼 몇 층의 아치와 입구 양 옆의 열주(列柱), 그 아래의 돌벽에만 보이지만, 단지 그리스도교적 주제(主題)의 것뿐만이 아니고, 다채로운 주제가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정면 입구 주변을 장식하는 수많은 조상군과 부조(浮彫) 등에 의해 서유럽의 독자적인 인간상(人間像)이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다. 샤르트르대성당의 서쪽 정면 ‘왕의 문’을 비롯해서, 파리 부근의 12세기 후반의 성당 입구 조각은 원주인상(圓柱人像)의 새 요소가 있었으나, 양식상으로나 도상상(圖像上) 로마네스크 조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3세기에 들어와서, 샤르트르·파리·아미앙·랑스 등 잇달은 대성당의 장식과 조각에서 고딕 양식은 확립되었다. 샤르트르는 12세기 중반의 서쪽 정면을 그대로 보존하고, 13세기 초에 남북에 새로 큰 문을 냈고, 13세기 중반에 거기에 대규모 조상군과 부조를 장식해 놓았는데, 도상(圖像)의 풍부한 내용과 짜임새에서는 첫째 가는 예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앙의 인간화 경향의 하나로 보이는 민중의 성모숭배(聖母崇拜)에 대응하여 성모에게 입구 장식을 바치게 된 것은 고딕 미술의 새로운 일면으로, 그 형식이 정해졌다. 13세기 고딕 도상은 복음서적인 《묵시록》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던 로마네스크 시대의 신비주의와 서사시적(敍事詩的) 경향에 대신해서, 신앙의 기초를 지성(知性)에 의해 다지고, 또한 인간적 감정과 융화하는 도상을 구하였다. 즉, 13세기 고딕 조각의 이상주의를 양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옛 성자의 숭배에도 실제의 농민이나 기사의 모습을 같이 결부시켜 그 도상을 만들었다. 현실과의 접촉은 조상(彫像)의 현실감에 충실해야 한다는 욕구에 부응하여 고딕 조각의 사실주의로 나타나고, 중세인이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이 현실감을 가지고 표현된다. 13세기 중반부터 이미 사실주의의 진행은 고전주의를 깨뜨리고, 14세기는 개성화를 진전시켜 초상 및 초상적 작품의 예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너리즘의 조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도 조각가들의 힘찬 사실주의로 그 때까지의 우미(優美)한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성격적인 극적 조상을 실현하여, 건축에서 독립한 15세기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후기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양식에 걸쳐 독일 조각은 훌륭하였으며, 13세기의 조상군, 13∼14세기의 슈트라스부르크의 조각은 프랑스에 못지 않은 힘 있는 성격적 표현을 이어왔다. 15세기에는 제단 조각(祭壇彫刻)으로 발달하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는 목조주상(木彫鑄像)에 많은 명장(名匠)을 배출하였다.
【회화】 고딕 회화의 대표적인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이다. 고딕 성당 건축에는 창문이 많고 벽면이 적어서, 자연히 스테인드 글라스의 발달이 싹텄다. 간단한 것은 카롤링왕조 후기에도 있었고 12세기 전반기에도 있었으나, 12세기에 들어와서 고딕 성당 건축이 발달하면서 개화하게 되어, 맑은 청색과 강한 붉은 색의 배색이 훌륭하였고, 화상(畵像)도 점차 인간적 감정을 여유 있게 나타내게 되었다. 13세기에는 전성기에 달하여, 데생(dessin)은 자연스러움이 더해지고, 힘을 잃지 않았으며, 배색도 더욱 섬세해지고 그림에도 깊이가 더하게 되었다. 당시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오늘날에도 많이 보존하고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장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여러 여러 빛깔의 유리 조각을 H자형 납테에 끼워, 창문 전체를 종교적 화상으로 메운 이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의 영롱함은 이 성당 안을 완전히 종교적인 법열(法悅)로 채우게 한다. 파리 왕성(王城) 안의 상트 샤펠은 4면이 모두 창인데, 모두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성당이다. 이런 추세는 13세기 중기 이후, 제작을 서둘러 장식 효과는 아름다우나 깊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무색(無色) 유리에 단색 데생의 그리자유(grisaille) 수법이 나타났고, 한편 유색(有色) 유리는 회화(繪畵)의 영향으로 색조(色調)의 뉘앙스는 풍부하게 되었지만, 빛의 예술인 본래의 성질은 약화되었다. 회화 부문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이 다루어야 할 것은 사본장식(寫本裝飾)의 삽화인 미니어처(miniature)이다. 로마네스크 회화나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여 인간상을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해서, 인간적 감정의 분명한 모습을 그려낸 것은 13세기 초의 영국과 프랑스의 미니어처였다. 이것은 뒤에 건축의 호화스러운 액자에 끼워졌다가 13세기 후반부터는 왕후의 사치스러운 생활환경을 반영하게 되었다. 사본장식의 대표적 화가 장 퓌셀의 화풍은 파리 양식으로서, 당시의 고딕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서민적인 사실주의는 매너리즘(mannerism) 속에 사멸하는 고딕 회화를 구하게 되었다. 이것을 14세기 후반부터 활약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들이 이어받아 사실주의를 착실하게 추진해 나갔다. 이탈리아에서의 고딕 건축은 알프스 이북의 건축과는 다소 달리, 창이 적고 벽면이 더 커서 벽화제작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3∼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우수한 화가들이 활약하여 14세기 미술의 방향을 크게 돌려놓았다. 이것은 15세기의 르네상스 미술로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조토(Giotto di Bondone)가 그린 인간상은 그 때까지 보지 못하던 힘찬 양감(量感)과 움직일 듯한 기운이 있어서 거의 조상(彫像)과 같은 인체인데, 북프랑스 성당의 고딕식 부조군(浮彫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셰나 화가들로, 저마다 걸작을 이 도시에 남겼다. 이들의 활약으로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에 걸쳐서, 전(全) 유럽적 유행을 보인 고딕 국제양식이 탄생하였다. 벽면이 없는 북방 고딕 건축은 벽화의 발전이 그리 성하지 못하였으나, 직물화(織物畵)로서 북프랑스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왕성하게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종교적·사전적 제재(史傳的題材)나 그 밖의 당시 풍속을 다룬 것들도 있어서 흥미롭다. 14세기경부터 종이가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자 판화도 유행하였으며, 또한,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목판화가 나타났고 얼마 뒤에는 동판화까지 나타나는 등 각지에서 여러 형태로 발전하였다.
고딕의 부흥(Gothic Revival) 중세적인 형태와 중세풍의 취미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관심에서 18세기에 시작된 고딕 양식의 부활. 일부는 문학에서 시작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팔라디안의 엄격한 건축 디자인 규범의 파괴에서 시작도었다.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 초기에는 단지 고딕식 장식이 있는 그레고리안 건축이 그 표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의 양식은 종교적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푸긴과 같은 건축가는 그것은 '이교적인 르네상스양식과 반대되는 것으로 교회에 적합한 유일한 양식' 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중세의 고딕 건축물을 조심스럽게 모방하며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14세기 건물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영국이나 그 이외의 또다른 진보된 중세 양식들이 유행하였다. 위리엄 버터필드, 스프리트와 같은 건축가들에 이놹해 고딕의 원칙들이 채택되었다. 그 외의 지도적인 건축가로는 길버트 스코트와 피어슨이 있다. 고딕 양식은 도시 및 상업건축을 포함하여 19세기 영구 건축을 휩쓸었다. 찰스 이스트레이크 경은 1871년 <고딕부흥의 역사>란 책에서 고딕 양식을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운동'이라고 언급하였고, '조형예술에서 순수하게 영국적인 운동일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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