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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고분_古墳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19.

고분(古墳)


  고대 사회의 무덤은 그 시대 문화 역량의 총체적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들은 대체로 왕이나 지배층의 것들로서 사후 세계의 생활을 중요시한 고대인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는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묻혀 있는데, 그 전실(前室) 천정부분의 명문에 "자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벼슬은 후왕(侯王)에 이르게 하며 후세까지 쇠고기, 양고기, 술, 쌀밥, 맛있는 반찬[牛羊酒肉米餐]이 끊이지 않게 해달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무덤을 만든 이유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고분이란 과거 우리 조상이 묻힌 무덤을 통칭하는 뜻도 될 것이나, 고고학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여기서 한정된 시대란 선사시대 부족사회에서 고대왕조가 확립되는 삼국(三國)의 건국으로부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무덤이 성행하여 고분 축조가 쇠퇴된 시기까지를 말한다. 고분에는 땅속에 파묻는 토장(土葬), 물속에 넣는 수장(水葬), 지상에 시체를 노출시켜 썩게 하거나 짐승에게 먹이는 풍장(風葬), 불에 태우는 화장 등 여러 기본 형식이 있다. 인류가 언제부터 이러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구석기시대 중기부터이며 약 7,8만 년 전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시는 땅을 약간 파고 굽혀묻기[屈葬]한 형태이었는데, 신석기시대가 되면 고인돌[支石墓]과 같은 거대한 석조 건조물이 나타나고, 청동기시대에는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무덤이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무덤에는 각종 껴묻거리가 풍부하게 매장되었다. 따라서 무덤이 커지고 내부에 각종 껴묻거리를 풍부하게 매장하였기 때문에, 고분의 매장방법을 통하여 고대인의 사상 및 신앙, 기타 관계된 풍습과 제도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꾸미개·무기· 용기(用器) 등으로 그 시대의 문화·미술·공예 수준과 내용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분은 기록에 나타나는 고대인의 생활과 풍속을 실지로 보여주거나 보충 설명해줄 뿐 아니라, 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시기의 문화와 생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준다. 고분에서 주검의 매납(埋納)시설은 크게 구덩식[竪穴式]과 굴식[橫穴式] 계통의 둘로 나누어진다. 구덩식에는 돌방[石室]·점토곽(粘土槨)·나무널[木棺]·돌널[石棺] 등이 있고, 굴식으로는 돌방이 있다. 구덩식계통 무덤은 한번 주검을 매납하여 밀폐하고 추가장은 행하지 않지만, 굴식돌방의 경우는 입구에 문을 달아 그 문을 열면 추가장이 가능하다. 이는 매장에 대한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껴묻거리도 주검의 몸에 매달은 꾸미개 및 무기류·의식용그릇류 등이 보이는데, 대개 오래된 고분에는 보기(寶器)적인 것이 많고 시대가 내려오면 실용적인 것이 많아진다. 한국의 무덤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시대 이후로 무덤형식이 다양해지고, 역사시대에는 각지에 고분군이 남아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는 껴묻거리가 빈약해지거나 아예 없어져서 고고학에서의 고분 연구성과는 삼국시대의 그것보다는 많이 줄고 있다.

 

【선사시대】 <신석기시대>  이 시대의 무덤으로는 1988년 전까지만 해도 인천 옹진군 시도(矢島), 부산 영도구 동삼동과 북구 금곡동의 조개더미유적, 충남 서산시 해미면 휴암리(休岩里)의 산위 포함층유적에서 조사된 돌무지유구와 경북 울진군 후포면(厚浦面) 후포리에서 조사된 세골장(洗骨葬)유구가 그 대상으로 논의되었다. 그런 가운데 88년 4월 경남 통영시 상노대도(上老大島)의 산등유적에서 온전한 형태의 신석기시대 인골이 검출되었고, 그 해 9월 통영시 연대도 조개더미에서 2구의 인골이 검출되었다. 이 중 1호분은 유구도 분명하고 잔존한 인골의 상태도 양호하며 껴묻거리도 발견되어, 처음으로 한국 신석기시대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이 무덤은 시신 위에 돌무지를 덮은 형태로, 대개의 신석기시대 무덤은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이 시대의 무덤양식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독무덤[甕棺墓]·움무덤[土壙墓] 등이 새로 들어와 초기철기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유적 중 가장 특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과 일본 규슈[九州], 중국 랴오둥반도 등에 퍼져 있으나 한반도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고 있다. 서유럽의 고인돌과 비슷한 것도 있으나 이들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과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무덤형식인 듯하다. 고인돌은 주검의 위치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판돌[板石]로 땅 위에 네모난 방을 만들어 주검을 넣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돌을 얹은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北方式)과, 땅 밑에 판돌 및 깬돌[割石]로 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은 뒤 굄돌[支石] 또는 돌무지 위에 덮개돌을 덮은 바둑판식[碁盤式] 또는 남방식이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대표적인 출토지의 지명을 따라 전자를 오덕리형고인돌, 후자를 침촌리형고인돌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에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丹陶磨硏土器]·반달돌칼·돌검·돌살촉이 묻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파형동검을 부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청동제품은 발견된 예가 많지 않다. 돌널무덤은 지하에 판돌· 깬돌로 널[棺]을 만들고 판돌 및 나무판자로 뚜껑을 덮은 것으로, 대개 북방 시베리아 계통의 무덤 양식으로 보고 있다. 봉분(封墳)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지역과 묻힌 자의 신분에 따라 형식과 껴묻거리의 양이 다르다. 여기에는 돌검·돌살촉·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출토되며, 간혹 청동기도 함께 나온다. 충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깬돌로 널을 만들고 구덩이의 윗부분을 돌로 채우는 특이한 형식으로,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청동거울, 각종 의기(儀器), 덧띠[粘土帶]토기, 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어 지역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부여·공주 일대에서는 이 시대의 독무덤도 나오는데, 바닥에 구멍을 뚫은 일상용 토기를 바로 세워 묻고 아가리를 판돌로 덮은 형식이다.


<초기철기시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나라에는 고인돌[支石墓]이 많이 만들어졌으나, 철기시대 이후에는 봉토분이 많이 만들어진다. 철기시대 이후 지배층의 무덤양식에는 흙무덤[封土墳]·덧널무덤[土壙木槨墓]·독무덤[甕棺墓]·돌방무덤[石室墳]·돌널무덤[石棺墓]· 돌무지무덤[積石塚] 등이 있다. 그 중 삼국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는 무덤 양식으로는 흙무덤과 돌방무덤이 결합된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과 돌무지무덤이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앞서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계속 축조되었다. 덧널무덤은 구덩이에 덧널과 껴묻거리를 묻는 것인데, 단독 또는 부부를 함께 묻기도 하였다. 봉분이 낮고 어떤 것은 머리가 잘린 피라미드형[方臺形]도 있다. 처음 중국의 전국시대 묘제가 요동(遼東)지역에서 토착화하여 대동강유역에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유력자의 무덤으로 차츰 널리 퍼져 대구·경주·김해 등 남부지방까지 퍼졌다. 서북한지역의 덧널무덤에서는 철기류와 함께 한국제 청동제품, 중국 한(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수레갖춤 등이 출토되며, 남한지역에서는 한국식동검·투겁창·꺽창·가지방울·거울 등 다양한 청동제품과 쇠칼·쇠손칼· 쇠도끼·철제말갖춤 등이 같이 결합되어 출토되고 있다. 한편, 독무덤은 크고 작은 항아리나 독을 2,3개 맞붙여서 옆으로 눕힌 형식인데, 어른을 넣을 수 있을 만큼 큰 것도 있고 어린이용이거나 세골장용의 작은 것도 있다.


【역사시대】

 <원삼국시대>  이 시대에는 무덤에서 크게 변화가 일어나 앞 시대의 고인돌· 돌널무덤[石棺墓] 등이 자취를 감추고, 소형의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덧널무덤[土壙木槨墓]이 출현하였으며, 북쪽에서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 나타난다. 그리고 재래식 무덤 중 양식상에 다소 변화가 있지만 덧널무덤과 독무덤[甕棺墓]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돌무지무덤은 북쪽 고구려지역인 환인(桓因)지방에서 나타나는데,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그 위에 널을 놓은 뒤 다시 돌을 쌓은 형식으로 한강 유역 등 중부지방에서도 일부 나타난다. 그 밖에 여러 형식의 무덤이 대동강·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경주시 조양동(朝陽洞)유적의 덧널무덤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형식으로 새로운 형식을 가진 토기와 중국 한식(漢式)거울이 출토되어 중국의 영향이 경주지방에 어떻게 도달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삼국시대>
(1)고구려 :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는 돌무지무덤과 돌무덤[石塚] 및 흙무덤이 있다. 초기(1-3세기)의 돌무지무덤은 환인(桓因) 지방에서 나타나는데,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그 위에 널[棺]을 넣은 후 다시 돌을 쌓은 형식이다. 돌무지무덤은 그 뒤 점차 냇돌 대신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는데, 이를 보통 돌무덤[石塚]이라고 한다. 통구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유역과 한강 유역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돌무덤의 외형은 대체로 4각형[方臺形]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돌무덤을 그냥 돌무지무덤으로 혼동하여 부르는 경우도 있다. 3세기 말 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墳]의 영향을 받아 통구 지방에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고분의 입구에서 玄室에 이르는 길]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층의 돌무덤에 들어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이는 부부의 합장 무덤이다. 돌무덤으로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태왕릉·천추총 등이다. 특히 태왕릉은 한변의 길이가 60m이며 7단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무덤으로 부근에서 '원태왕릉 안여산 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고 쓰인 명문이 있는 벽돌이 출토되었으며 이 무덤에서 약 500m 가량 떨어진 곳에 광개토왕비가 세워져 있어,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장군총에서는 돌무덤 주위에 한쪽에 3개씩 모두 12개의 긴 돌[長大石]을 기대어 놓았는데, 이것이 통일신라시대로 가면 12지신상으로 바뀐다. 돌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 천도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게 된다.  몇 차례에 걸친 도읍의 변천에 따라, 이 시대의 고분은 중국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상류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유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고분은 분구(墳丘)의 축조형식에 따라 돌무지무덤[石塚]과 봉토분[土塚]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거대한 고분일지라도 그들의 박장(薄葬)풍습 때문에 실물로 남아 있는 유물은 매우 빈약하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건국 초부터 조성된 무덤으로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渾江)유역의 환인(桓因)지방과 독로강(禿魯江)유역의 시중(時中)·자성(慈城)·위원(渭原)군 등에 군집되어 있다. 초기에는 냇돌을 덮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에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는데, 이러한 돌무지의 외형은 대체로 피라미드형[方臺形]을 이룬다. 3세기 말~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墳]의 영향을 받아 퉁거우 지방에서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계층의 돌무지무덤에 들어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든 것이 많은데 이것은 부부 합장인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장군총(將軍塚)·태왕릉(太王陵)·천추총(千秋塚) 등이다. 이들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 천도(遷都)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편, 봉토무덤(封土墳·塚)이란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을 반지하 또는 지면 가까이에 축조하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진흙·숯·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이다. 이는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 사이에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평양 천도 이후는 이 무덤의 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봉토는 돌무지무덤처럼 방대형을 이루나 때로는 바닥 주위에 몇 단의 돌기단을 쌓기도 한다. 돌방은 방의 수에 따라 널방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墓]과 앞방[前室]·뒷방[後室]· 옆방[側室] 등 두 방 이상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多室墓]으로 나뉜다. 돌방의 벽은 이른 시기에는 냇돌 또는 깬돌을 썼지만, 후에는 잘 다듬은 큰 판석을 여러 장 세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납작천장[平天障]·활천장[穹天障]·모줄임천장[抹角藻井式天障] 등이 있는데, 특히 후자는 천장 네 귀에 삼각형으로 받침대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석 한 장을 덮는 형식이다. 이러한 봉토분 중에는 돌방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는데, 이 무덤은 축조방법과 그림의 주제(主題) 및 변천과정으로 보아 3시기로 구분한다. 전기(350~450년쯤)부터 100년 단위로 구분하는데, 전기에는 무덤 주인공의 인물풍속도가 주로 보이다가, 중기(450~550년쯤) 이후에는 사신도(四神圖)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을 비롯해서 불교적인 장식무늬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봉토분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 사이에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평양 천도 이후에는 이 무덤 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한편 이들 봉토분 가운데에는 돌방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무덤의 축조 방법과 그림의 주제 및 변화 과정에 의해 3시기로 구분한다.  전기(350-450)의 무덤으로는 외방무덤(單室墓) 또는 여러방무덤(多室墓)이 있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있다. 그림은 벽면에 회칠을 하고 회가 마르기 전에 묵선(墨線)으로 윤곽을 그린 후 안료로 채색하는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 주제로는 안악 3호무덤(冬壽墓)과 덕흥리 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부부초상·사냥·무용·행렬을 비롯한 생활 모습을 담은 인물풍속도·생활풍속도가 주로 보인다.  중기(450-550)의 무덤은 돌방의 축조가 고구려식으로 정착되면서 앞방이 작아져 딸린 방처럼 되고 주인공의 초상도 널방으로 옮겨진다. 그림의 주제도 전기의 인물 중심에서 사신도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비롯하여 불교적인 장식무늬도 나타난다. 그림도 필치나 구도가 자유로와지며 고구려적인 화풍이 전개되고 있다. 각저총(씨름무덤)·무용총(춤무덤)· 개마총(鎧馬塚, 개마는 무장한 말) 등이 있다.  후기(550-650)의 무덤은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외방무덤이 대부분이며 무덤바닥이 지면 가까이 내려간다. 그림의 주제는 사신도 일색으로 변하는데, 사신도의 배경에는 나무와 구름 등의 사실적인 것 외에도 해와 달,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日月星辰]·신선·동물 등의 도교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힘차고 화려한 색체로 고구려의 국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기와는 달리 물갈이[水磨]한 벽면 위에 그림을 직접 그리고 있다. 집안의 사신총· 진파리 1 2호무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 외방무덤의 축조 방법과 벽화의 주제 등은 백제·신라에도 전해진다. 이들 고구려의 돌방무덤이나 벽화무덤은 다양한 구조와 소재에 비하여 출토유물이 매우 적다. 아마 원래 무덤 속에는 껴묻거리[副葬品]들이 넣어졌을 것이나, 봉토분의 대부분은 도굴이 쉬워 부장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일부 무덤에서 나온 공예유물(관·관식·귀걸이·허리띠·신발·말갖춤)과 토기 등을 통하여 고구려의 문화 수준을 살필 수 있다. (2) 백제 : 이 시대의 무덤에는 돌무지무덤과 봉토분이 있으며, 봉토분에는 돌방무덤·돌덧널무덤· 움무덤[土壙墓]이 있다. 백제 초기인 한성(漢城)시대의 무덤양식은, 널무덤·돌덧널무덤 같은 토착적인 묘제에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함께 합장이 가능한 돌방무덤이 퍼져 들어왔으며, 입지에 있어서도 처음 고구려식 평지무덤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언덕으로 올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돌무지무덤은 한강유역에 특징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 재래식 무덤형태로 얕은 대지 위에 네모난 돌무지를 층층으로 쌓아 올리고 가운데 주검을 넣은 형식이다. 제일 아래 단의 네 변에는 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돌을 설치하였는데, 한 변이 50 m가 넘는 큰 것도 있다. 그 밖에 널무덤은 지하에 구덩을 파서 널을 묻고 때로는 독널을 곁들여 묻었는데, 봉토에 돌·기와를 표토 가까이에 한 겹 덮은 것이 특색이다. 웅진(熊津)시대가 되면 고구려계통의 돌무지무덤이 없어지고 널길이 달린 돌방무덤이 한성시대에 이어서 계속 만들어지며, 중국계 벽돌무덤이 새로이 만들어진다. 벽돌무덤은 백제시대를 통틀어 공주에 2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단면이 터널모양이고 기다란 전돌을 가지고 길이모 또는 작은모쌓기로서 반복하여 만든 것이다. 사비(泗?시대의 무덤은 한성· 웅진시대에 이어 기본적으로 장방형 돌방이 유행한다. 한편, 전남지방에는 늦게까지 토착적 묘제를 고수하여 특별히 큰 독무덤[甕棺墓]이 유행하였다. 영암(靈岩)·무안(務安)·나주(羅州) 등지에서 발견되는 이 독무덤은 지방 호족(豪族) 또는 마한 잔여세력의 묘제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백제 고분의 변천은 대체로 도읍의 위치에 따라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성시대에는 도성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무덤이 만들어진다. 무덤 양식에는 돌무덤과 흙무덤이 있다. 흙무덤은 방이동과 석촌동 등에 남아 있다. 돌무덤은 고구려 초袖? 무덤 형태와 비슷하다. 잠실 석촌동 고분 공원에 돌무덤이 여러 개 남아 있어 백제 지배층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기록의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웅진시대가 되면 고구려 계통의 돌무덤이 없어지고, 널길달린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한성시대에 이어서 계속 만들어지며, 중국계 벽돌무덤[塼築墳]이 새로 만들어진다. 특히 장방형 돌방무덤에는 천장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으나 기본 구조는 비슷하다. 벽돌무덤은 백제 시대를 통틀어 공주에 2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단면이 터널 모양이고, 기다란 전돌을 가지고 길이 모 또는 작은 모쌓기를 반복하여 만든 것이다. 송산리(금성동) 6호분의 벽면에는 회칠을 한 뒤 사신도를 그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말해주고 있으며,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되어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가 나와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묘제나 미술 공예 연구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백제사 연구에 큰 영향을 준 중요한 유적이다.  사비시대가 되면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장방형 돌방무덤이 유행하지만 능산리 고분군에서 보듯이 널길이 더욱 넓어져 널방의 너비와 거의 같아진다. 특히 능산리 동하총의 경우는 벽 한면이 하나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상자형 돌방으로 벽면은 물갈이[水磨]한 후 직접 벽에 사신도를 그렸다. (3) 신라·가야 :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독무덤, 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경주 시내에는 4세기~6세기 전반에 조영된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이 곳곳에 있어, 당시 신라의 힘과 부를 상징하고 있다. 이 무덤은 지하·지상에 덧널을 짜 놓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뒤 덧널의 상부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특이한 구조인데, 한 봉토 안에 덧널을 여러 개 넣은 것[多槨式], 하나만 넣은 것[單槨式], 그리고 봉토를 잇대어 외형을 표주박 모양으로 한 쌍무덤[瓢形墳] 등 몇 가지 형식이 있다. 이 무덤에는 봉토의 크기에 걸맞게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껴묻혔는데, 대표적 무덤으로는 금관총(金冠塚)·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塚)·식리총(飾履塚)·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皇南大塚)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신라의 무덤으로는 덧널무덤[木槨墓]·돌덧널무덤[石槨墓]·독무덤[甕棺墓]·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태가 보이고 있으나, 이 양식들은 신라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야에서의 보편적인 무덤과 일치되고 있어 전형적인 신라무덤은 역시 위에서 이야기한 돌무지덧널무덤이다. 한편, 가야고분은 가야의 옛 영역인 낙동강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산재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돌덧널무덤이다. 4세기경에 이르면 경주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이 성행하고, 영남지역 일대에서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널리 쓰인다. 혹자는 이 돌덧널무덤만을 가야고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두꺼운 깬돌[割石]을 쌓아 네모진 돌덧널을 만들고, 다시 그 안에 주검을 넣은 널[木棺]이나 돌널[石棺]을 배치한 양식이다. 이 묘제는 돌상자무덤에서 변화 발전한 고인돌 이래의 전통이며, 움무덤[土壙墓]과 함께 경상도 지방에 깔려 있는 기본 묘제라고 하겠다. 이 돌덧널무덤은 매장방법에 따라 구덩식과 앞트기식으로 구분되며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4) 통일신라시대 : 이 시대의 무덤에는 돌방무덤[石室墳]·돌무덤[石塚]·화장무덤[火葬墓] 등이 있다. 돌방무덤은 6세기경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처음에는 돌무지덧널무덤과 같이 평야지대에 만들어졌으나 곧 경주 분지 주변의 구릉지대로 옮겨 간다. 초기의 돌방무덤으로는 노서동(路饍)의 쌍상총(雙床塚)이 있다. 이 밖에 경주의 돌방무덤과는 달리 돌을 덮어 쌓아 봉토를 만들어준 돌무덤이 있다. 이러한 무덤은 울릉도(鬱陵島)에서만 조사되었는데, 그 안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도장무늬[印花文]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불교의 성행으로 화장(火葬)이 성행하여 뼈를 항아리에 담아 묻는 매장 방법이 유행하였다. 뼈항아리는 그대로 땅속에 묻기도 하나, 지하에 돌로 덧널을 짜고 그 안에 뼈항아리를 넣기도 하고 뼈항아리가 들어 있는 다듬은 돌상자[石函]를 지하에 묻는 방법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경주박물관에는 우수한 녹유(綠釉) 골호가 전시되어 있다.


고분벽화 ( 古墳壁畵 )

 널방[墓室]의 벽면에 그림을 그린 고분. 원칙적으로는 도료를 사용하여, 어떤 구상적(具象的)인 묘사를 하는 것을 말하지만, 단지 장식무늬적인 것이나 선각화(線刻畵)·부조(浮彫) 따위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왕후 귀족의 대규모적인 무덤의 벽면에 초상·생전의 생활·장의(葬儀)·사후의 세계 등을 그린 것이 많다. 유럽에서는 에트루리아의 것이 유명하고, 타르퀴니아에서는 BC 6세기경부터 많은 벽화무덤이 있었다. 로마나 헬레니즘 세계에도 그 예는 있고, 이집트에서는 선왕조시대(先王朝時代)의 히에라콘폴리스에도 있었으며, 제3왕조 때에 왕후 귀족의 묘에 벽화나 채색 및 부조가 많았고, 신왕조시대의 테베에서는 묘의 벽화가 주가 된다.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의 중원지역(中原地域) 호족층 무덤에서 비롯되어 후한(後漢)·위진 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의 벽돌무덤에서 벽화를 볼 수 있다. 당(唐)나라의 이수묘(李壽墓)·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 등이, 송(宋)나라의 창사[長沙] 조대옹묘(趙大翁墓)가, 원(元)나라의 산시[山西] 벽돌무덤 등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낙랑(樂浪)의 219호분, 고구려의 안악(安岳) 3호분, 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 등 다수이고, 초상과 각종 생활·풍속·사신(四神)·신선(神仙)·일월성신(日月星辰) 등을 그리고 있다. 백제에서도 송산리(宋山里) 6호분·능산리(陵山里) 2호분 등이 있고,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도 소감(小龕) 주위에 채색이 있다. 신라·가야에서도 양주동(楊州洞), 고아동(古衙洞)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나라[奈良]의 다카마쓰총[高松塚] 고분의 벽화가 한국· 중국과의 관련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