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미술
고려시대 (918∼1392)는 약 9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문화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開城)으로 옮겨짐으로써 쇠퇴하고 있던 10세기의 한국미술에 새로운 북방적 힘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런 르네상스적 현상은 조각에서 가장 뚜렷하다. 10~11세기에 걸쳐 커다란 철불(鐵佛)이 많이 만들어져, 그 중에는 석굴암의 본존(本尊)을 본뜬 것도 있고 신라 말의 무기력한 조각과는 달리 고려 초기의 불상은 희열에 넘친 웃음으로 가득차고 기다랗게 째진 눈, 날카로운 코 등에서 청신한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위축되고 경직된 데다가 송(宋)나라와 원(元)나라 조각의 장식성을 곁들이면서 타락된 모습은 조선시대로 이어지나, 신라의 땅 안동(安東)에서 발견된 목제 가면의 일군(一群)과 백제의 땅에서 전통을 이어받아 인체(人體)의 유연성을 암시하는 소석불(小石佛)· 소불(塑佛)은 이채를 띠고 있다. 목조건축(木造建築)은 중국계의 고식소조양식(古式疎組樣式)이 채용되어 특수한 공포(包)가 사용되고, 14세기에는 장식적인 힐조양식(詰組樣式)이 들어온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목조 건축은 안동(安東)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영풍(榮豊)의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예산(禮山)의 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등인데 극락전은 13세기의 건물이다. 석탑은 신라탑에 비하여 고준(高峻)해지고 옥개석(屋蓋石)도 두꺼워져 신라의 세련미가 상실되었으나, 묘탑(墓塔)에는 11세기적인 섬세함을 나타낸 작품도 많다. 회화는 한두 점의 고분벽화 외에 외국에 전해지고 있는 몇 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공예 중 동제(銅製)의 범종(梵鐘)은 초기의 흥천사종(興天寺鐘) 등 충실한 방고작품(倣古作品)도 있으나, 점차 형식과 기술이 타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짤막한 소형종(小形鐘)이 유행하였다. 형식도 신라종과는 달리 상대(上帶) 또는 견대(肩帶) 위쪽에 화형식대(花形飾帶)가 도드라지고, 부조(浮彫)된 비천은 선각(線刻)의 불상으로 바뀌었다. 청자(靑瓷)는 웨저우요계[越州窯系]의 영향 아래 10세기 말경부터 전북의 부안군(扶安郡) 보안면과 전남의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방면에 발달하여 고려청자의 제1기(1010∼1150)로 들어간다. 이 시기에는 비색(翡色)이라 불리는 독특한 청록색 유기(釉器)가 만들어졌으며, 각문(刻文)을 시문한 것도 있으나 무문(無文)의 것도 많고, 유색(釉色)·형태가 아울러 정교한 청자가 생산되었다. 제2기(1150∼1250)에는 바탕색 그 자체는 쇠퇴하고 구름·학·버들 등의 문양상감청자로써 특징지어지고 있다. 제3기(1250∼1392)는 쇠퇴기로서 상감청자 외에 회청자(灰靑瓷)도 많이 생산되었지만 청자의 색은 칙칙해지거나 갈색(褐色)을 띠게 되고 형태· 기법 또한 말기적 양상을 드러냈으며 청자 외에 백자·철사유(鐵砂釉) 등도 만들어졌다. 고려도 치국(治國)의 정신적 배경이 불교에 있었던 만큼 이 시기에 생산된 미술 작품 역시 직접 불교와 관련이 있음은 물론, 일상 용구에 이르기까지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반영되었다. 즉, 사원 건립의 성행으로 많이 세워진 당탑(堂塔)은 물론 이에 부수되는 각종 건조물과 상설(像設), 그리고 불교 행사에 필요한 불구(佛具)들은 직접 불교와 관련된 작품들이기에 말할 나위도 없으나, 도자기와 와전(瓦塼)에까지도 불교와 직결되는 문양이 채택되거나 불교적인 정신세계가 문양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정신세계를 배경으로 그들이 남긴 미술 작품에는 시기에 따라 양식으로 변화하는데, 그 변화는 무신정권의 성립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전기·후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기는 신왕조 건설에 따르는 기백과 의욕에 넘쳐 건실한 작풍이 나타난 시기로, 석탑이나 석불의 제작에서 거대한 작품들이 나타나고 부도(浮屠)에서는 정교한 표면장식이, 공예부문에서도 청자의 비약적인 발전과 각종 금속제품의 발달로 나타났는데, 그 절정기는 아마도 문종(文宗) 때인 11세기 중엽으로 보인다. 이에 비하여 후기가 되면 목조건축의 가구형식(架構形式)의 변화, 도자기 요법(窯法)의 변화, 서화에서 원(元)의 서법이나 화법의 추종, 불상조각의 퇴보와 새로운 양식의 도입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여러 방향에서 고찰되겠으나, 정치의 문란, 종교관의 변화, 중국 원나라 미술의 침투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의 변화가 반드시 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술의 전체 흐름에서 볼 때, 전기에 나타났던 새로운 방향으로의 활발한 진전은 후기에 와서 창조로의 연결을 보지 못하고 오직 변화에 그치고 말아 일부를 제외하고는 쇠퇴일로를 걸었다. 고려는 사치스러운 현실 주의에 뿌리박은 건축, 공예 등의 미술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원인은 "송"의 문물 제도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거란·여진·몽고등 북방 민족들의 잇단 침략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문화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고려가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등 중국의 왕조들과 문화적 교류를 빈번히 하면서 미술 양식을 수용하여 자체의 미술을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시대의 모든 미술이 시종 완벽을 지향했던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지 모르나 이 시대 미술의 주된 경향은 역시 귀족적 문화를 구현하는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와 비교하여 같은 미술 계통에서도 분야에 따라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 미술에서도 불교 회화와 공예는 호화롭고 정교하여 아취가 넘치는 경향으로 발전되었지만, 불상이나 불탑은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다소 균형이 깨지고 경직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고려시대의 불상이나 불탑등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수준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또한 중앙과 지방과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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