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近代美術)
19세기 후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l945년 전후의 미술. ‘근대적’이란 형용사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사용되었고, 18·19세기에도 ‘예전’과 다른 ‘새로움’의 가치개념으로 쓰였다. 미술사에서 근대는 근세와 구별되나, 이 구분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다르다. 역사적 의미에서 르네상스 이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나, 보통은 인상주의로부터 비롯되어 20세기 전반에 나타나 여러 가지 분극적, 전문적 발전을 이룩한 미술 사조를 가리키고 있다. 자연을 모티브로 해서 사상의 전달방법이 근대성을 띠어가는 인상주의를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또 세잔느의 조형사상의 혁명을 근대성의 창시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이 그 구분에 대해서는 명료하지 않지만, 모던 아트의 모던은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라기보다도 입체파를 거쳐 전개되는 조형 감각이 표출하는 '현대(contemporary)'를 의미하며 주로 아방가르드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사물의 단순한 재현을 배격하고 개성적 감각에 기초를 둔 독특한 조형적 형식을 지닌 작품 전반을 근대 미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통상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농피규라티브 등이 포함된다. 미술에서 그 근대성이 특히 강조된 것은 l9세기였다. 시인 P.C.보들레르가 《살롱 비평(批評)》 (1845~46)과 평론 《근대생활의 화가》(63)에서 주체의 금일성(今日性)과 기법, 특히 색채가 차지하는 중요성의 관점에서 근대성을 강조한 것이 그 시초였다. 1883년 J.K.위스망스도 인상파(印象派) 그룹을 《근대미술》이라고 표제한 책에서 논하였는가 하면, 무텔의 《근대미술사》, J.무어의 《근대회화》와 같은 단행본도 출판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당시의 전위미술 또는 새로운 예술을 근대적이란 형용으로 총괄하려고 한 시도였다. 보다 새롭고, 보다 현대적이려는 의식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모든 미술가와 비평가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서유럽 근대미술의 시대적 특징은 이러하다.
① 프랑스혁명 후, 작품의 제작자와 주문자의 관계인 수요와 공급의 구조가 변화했고, 교회나 왕후 귀족에 거의 한정되던 종래의 후원자와 대체로 거기에 종속되던 제작자의 관계가 혁명 후 일반시민과 예술가라는 대등한 관계로 변한 것이다.
② 작품 발표형식이 변하였다. 관전(官展)과 기타 살롱·개인전·그룹전(展)을 통한 제작자의 자기 발언이 일반화되고, 작품의 유통은 주로 화상(畵商)이 장악하게 되었다.
③ 혁명 후의 시민사회 성립이 예술가 자신의 시민화도 뜻하면서 개성의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④ 미술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마침내 고유의 표현수단으로서 순수화의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곧, 주제성(主題性)을 배제하며,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는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새로운 회화수법’으로서의 근대적 표현의 첫 사례는 E.마네의 작품인 《튈르리궁(宮)의 음악회》(1860) 《잔디 위의 점심식사》 (1863) 《올림피아:Olympia》(1865)였다. 그것들은 화면의 밝음과 색채의 강한 대비, 대담한 색면(色面)의 배열, 주제성의 무시로써 ‘근대성’을 진전시켰다. 인상파 그룹은 마네의 그 혁명적 내면에서 자극받았다. 그러나 그 근대성의 저류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J.B.샤르댕 등의 일상생활에 대한 시각(視覺)과 영국 풍경화파의 성립 등이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비전을 예견하였다. 특히, F.J.고야의 비전과 수법은 분명히 18세기 경향과의 단절로서 빛과 색채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고야의 영향이 근대미술의 주류인 프랑스에 도입된 것은 1840년대 이후, H.도미에와 마네로부터 비롯된다. 개성 해방의 정열은 낭만파의 색채와 필촉의 열정적 움직임에서 이미 뚜렷하게 나타났다. F.V.E.들라크루아의 작품에 보이는 빛에의 관심은 인상파에 선행된 것이며 그 콘테스트를 거쳐 예술의 자유가 실현된 것이다. “나는 천사를 본 일이 없다”고 말한 G.쿠르베의 사실주의 풍경화가 묘사한 대기(大氣)와 빛의 표현도 인상주의에 앞서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에서의 J.M.W.터너와 J.컨스터블의 풍경화에서도 인상파적 수법이 확립되고 있었다. 마네의 밝은 색채에서 자극받은 인상파 그룹의 방향은 실은 그들이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쿠르베 일파의 사실주의의 연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순수한 표현 수법은 색점(色點)의 병치(竝置)로 현실 시각을 분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모네의 만년작인 《루앙의 성당》이나 《수련(睡蓮)》의 연작은 뒷날의 야수파(野獸派)와 추상회화(抽象繪畵)에 선행하는 요소를 내포하였다. P.세잔과 V.고흐를 포함한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해체된 자연의 재구성을 의도했으나, 그것도 결국은 화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에 입각한 재구성이었다. 그것 역시 자연 모방의 전통적 미학(傳統的美學)에서의 탈각(脫却)이 남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비파(派)의 중심적 작가인 M.드니는 “회화란 2차원의 평면상에 이루어지는 색채와 형태의 자유로운 배열이며 질서이다”라고 정의함으로써 추상회화의 출현을 예언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술의 근대적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20세기 초에 잇달아 나타난 야수파·표현파· 입체파·다다(dada) 등의 운동은 미술의 순수화를 촉구한 근대주의의 자율적 도달이었다. 거기엔 유럽의 정신사적 또는 사상사적 요인의 착종(錯綜)도 작용하였다. 선사시대(先史時代) 유적의 발견, 중세(中世)와 동양미(東洋美)의 인식, 아프리카 흑인 조각(彫刻)과 오세아니아 민예(民藝)의 확인 등으로 인한 유럽 문명의 가치관 전환과 반성, 기계문명과 도시생활의 발달에 따른 인간 소외현상, 그리고 건축과 디자인의 새로운 활기가 그 배후의 요인이었다.
포비슴(fauvisme:야수파)의 기치는 1905년의 살롱 도톤에 모인 일단의 젊은 화가들에 의해 올려졌다. H.마티스, A.마르케, M.블라맹크, A.드랭, 반 동갱, R.뒤피 등이 그 그룹이었다. 이들의 특질은 무엇보다도 원색(原色)의 대담한 구사에 있었다. 예를 들면, 하늘과 나무를 빨강으로 표현하는 식으로 전통적 사실주의의 색채 체계를 완전히 파괴해버린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expressionismus)는 크게 두 경향, 두 운동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Die Brcke)’파 중심, 또 하나는 10년 뮌헨에서 결성된 ‘청기사(靑騎士:Der Blaue Reiter)’그룹이 그것이다. 표현주의의 제1단계인 브뤼케파는 프랑스의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고흐와 E.H.P.고갱에 대한 강렬한 공감을 나타냈다. E.L.키르히너, S.로틀루프, E.H.헤켈 등의 3인이 주동한 브뤼케파의 의도는 회화방법 그 자체보다도 그 이전 단계인 정신상황과 내적(內的) 충동의 표출에 있었다. 제2단계의 표현주의인 청기사파는 브뤼케파와 같은 특정의 그룹은 아니고, 전위예술의 총집결을 뜻했다. 그 주도자는 1897년 러시아에서 뮌헨으로 와 있던 W.칸딘스키와 F.마르크, P.클레 등이었다. 청기사의 배경인 뮌헨 신예술가동맹 제1회전 카탈로그에 그들의 정신이 피력되었다. “내적세계(內的世界)의 경험을 집성하여, 그 전체적 체험을 예술의 종합으로 전개시킨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도는 l912년 출간된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서 한층 명쾌하게 표명되었다. 브뤼케파가 야수파에 가까운 반면, 청기사파는 파리의 입체파와 친근관계를 갖는 면도 주목할 만하다. 큐비즘(cubism:立體派)은 야수파의 감각주의와 폭력적 전통 폐기에 대한 주지주의적 반동(主知主義的反動)이었다. 그것은 또 색채 해방으로서, 상실한 형태의 회복이기도 하였다. 큐비즘은 보통 3단계로 이해된다. 제l단계는 1907∼1909년의 ‘초기 큐비즘’으로 그 주도자는 P.R.피카소와 G.브라크였다. 그들은 세잔의 이론인 “자연은 원추(圓錐)·원통(圓筒)· 구체(球體)로 형성된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발전시켜 모든 대상을 기하학적 질서로 해체· 재구성하였다. 제2단계의 ‘분석적 큐비즘’(l910~12)은 한층 치밀한 면분할(面分割)과 복수 시점(複數視點)의 평면화로 특징된다. 제3단계의 ‘총합적 큐비즘’(l913~14)은 주로 피카소와 그의 후배인 J.그리스를 중심으로 시도되었다. 그 특징은 실제의 사물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데 있다. 이른바 ‘속임수의 그림’(트롱프 뢰유) 수법의 목문(木紋)묘사, 신문 활자 또는 악보(樂譜), 기호의 삽입, 모래를 섞은 페인트의 질감·못이며 신문조각을 화면에 가져오는 파피에 콜레 수법 등이 그것이다. 큐비즘 활동은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끝났다. 중립국 스위스에서 전쟁을 피하고, 또는 대전(大戰)을 증오하던 T.차라와 아르프 등이 취리히에서 다다 그룹을 형성한 것은 1916년 2월이었다. 이들은 반전(反戰) 시위뿐 아니라, 일체의 전용적 문화· 예술을 부정하고 반미학적(反美學的) 태도를 취했다. 때를 같이하여 M.뒤샹과 F.피카비아 등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다다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유럽 전역에 확산되어 1917년에는 ‘베를린 다다’가 성립되었다. 전쟁의 참화와 파괴에 따른 기존 가치관의 도착(倒錯)· 불신(不信)이 그 배후의 정신 상황이었다. 레디 메이드(ready-made)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의 제시와 콜라주 등으로 특색되는 그들의 강렬한 반역적 작품행위와 수법은 1924년 시인 A.브르통과 L.아라공 등에 의해 선언된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과 1920년대 이후 뚜렷히 성립된 추상미술,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여러 예술 경향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조각(彫刻)에서도 그 근대적 양상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사실주의 또는 일류저니즘(illusionism)과 결별한 데 있었다. 여기서도 큐비즘에서 추상(抽象)에 이르는 새로운 조각 예술의 변화과정을 보게 되었다. 근대 미술은 근대적 시각을 형성하여 과거의 전통을 타파하고 전통적 예술 형성의 파기를 목표로 했다. 이는 근대 사회의 소산인 기계 문명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 미술은 조형적 구성과 근대적 감각을 특징으로 하며 동시에 시적인 환상도 포함된다. 따라서 선·면·색은 그 자체가 중요한 구실을 하며, 단편적 환상이나 상념 또는 기억 등도 새로운 내용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20세기의 잡다한 인간 감정이 드러나고 있으며, 사회적 배경이 반영된 정신적 불안이나 회의 및 부정이 뒤섞인 표현들도 나타나 있다. 한국의 근대미술은 국권피탈을 전후한 시기에 몇몇 외국인에 의하여 단편적으로나마 서양미술의 기법이 소개된 이래, 1908년 고희동(高羲東)이 일본에 건너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서양미술을 공부함으로써 한국의 신미술(新美術)은 그 막을 올렸다. 1918년 조석진(趙錫晋)·안중식(安中植)을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창립되었다. 또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적 자각과 함께 미술활동도 활발해져 에콜 드 파리풍(風)의 예술관이나 후기 인상파적인 화풍이 들어왔고 이종우(李鍾禹)·나혜석(羅蕙錫)·장발(張勃) 등이 서양 각국에서 미술수업을 하고 돌아오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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