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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나한도_羅漢圖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19.

나한도(羅漢圖)

 

나한도( 羅漢圖 )란 덕 높은 고승(高僧)을 그린 그림이며 나한은 아라한(阿羅漢:Arahan)의 준말이다. 아라한은 소승(小乘)의 수행자들, 즉 성문승(聲聞乘) 가운데 최고의 이상상(理想像)이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후에 불제자들이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階位)로 바뀌었다. 수행결과에 따라서 범부(凡夫)·현인(賢人)·성인(聖人)의 구별이 있는데, 잘 정비된 교학(敎學)에서는 성인을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위(四位)로 나누어 아라한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있다. 아라한과(果)는 더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이라고 하며, 그 이전의 계위는 아직도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단계이므로 유학(有學)의 종류로 불린다. 부처의 바로 아래 단계로 깨달은 고승들에게 붙이는 이름이어서 많은 나한들이 있지만 16나한, 5백나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나한들에 대한 신앙은 불교의 성행과 승려들에 대한 외경심과 함께 성행하였는데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나한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승려들에게 음식공양을 올리는 반승의식(飯僧儀式)이 국가적인 행사로서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부처의 제자들에게 재(齋)를 올리는 나한재도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의식의 성행은 나한도를 조성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많은 나한도 가운데 [5백나한도] 연작(連作) 몇 점이 국내외에 남아 있을 뿐이며 조선 전기의 이상좌(李上佐)가 그린 [나한도] 5점도 있다.황해도 해주시 신광사(神光寺)에 있던 [5백나한도(五百羅漢圖)] 중의 잔결(殘缺)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두 폭 그림이 있는데, 견본담채(絹本淡彩)로서 크기는 28.2×55.2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일백칠십혜군고존자(一百七十慧軍高尊者)>와 <이백삼십사상음수존자(二百三十四上音手尊者)>로, 승의(僧衣)는 비교적 굵고 힘있는 선으로 그려져 있으나, 인물의 얼굴묘사에서는 고조(古調)가 엿보인다. 북송(北宋)의 이성(李成)·곽희(郭熙)·이용면(李龍眠) 등의 화풍을 따른 그림이며 시주(施主)의 이름과 함께 을미(乙未)·병신(丙申) 등의 간지가 적혀 있다.
나한선(羅漢殿)이란 사찰 건물 가운데 나한상(羅漢像)이 있는 당우(堂宇). 대승불교에서는 세간(世間)에 남아 교법을 수호하겠다고 서원한 빈도라발라타사·가낙가벌차·소빈타·낙구라 등의 16나한과, 여기에 난데밀다라·빈두로를 더한 18나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5백나한, 이 밖에 천2백나한 등을 숭배하는 나한공(羅漢供)이 성행하였는데, 경북 영천시 청통면(淸通面) 은해사(銀海寺) 거조암(居祖庵)에 있는 5백나한전(五百羅漢殿)이 대표적인 예이다.나한신앙(羅漢信仰)이란 불교에서 나한을 그 대상으로 하는 신앙인데, 나한은 6신통(神通)과 8해탈을 모두 갖추어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복전(福田)이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이며, 고려에서는 923년 태조가 양나라에 보낸 사신 윤질(尹質)이 5백나한상을 가지고 귀국,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봉안한 이후부터 고려왕실에서는 1053년 문종이 신광사(神光寺)에서 나한재(羅漢齋)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베풀었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도 이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화가 전해지며, 태종 때와 세종 때에도 나한재가 베풀어졌다. 주로 16나한과 5백나한이 신앙되었으며,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영산전(靈山殿)을 두고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우에 10대제자 또는 16나한·18나한·5백나한을 봉안하였으며, 나한전(羅漢殿)·응진전(應眞殿)을 따로 건립한 사찰도 있다. 한국에서는 현재도 성행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나한도량은 경북 청도군 운문사, 전북 완주군 봉서사, 서울 강북구 수유동 삼성암(三聖庵)을 들 수 있다.
증심사 소장 나한도
증심사 대웅전 뒷편에 세워진 오백전은 무등산에 남아있는 사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사지에 의하면 세종25년(1443) 김방이 증심사를 3창할때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상을 조성 봉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증심사는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 석경, 수장, 도광의 3대 선사가 4창 했다하므로 오백전의 건립은 이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의 건물은 6.25전란때 불타버려 오백전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전각안에는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상을 모시고 있는데 오백나한은 석가가 열반한 뒤 그의 불전결집을 위해 모였던 5백명의 제자들을 말하며, 10대 제자란 석가의 고제 열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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