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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석탑(石塔)

by 태풍되고픈천둥 2013. 2. 19.

석탑(石塔)

 

미륵사지 석탑

 

 석재로 건립한 불탑(佛塔). 석조탑파(石造塔婆)를 줄여서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는 목탑(木塔)·전탑(塼塔)·석탑·모전석탑(模塼石塔)·청동탑(靑銅塔)· 금동탑(金銅塔)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1,300기가 넘는 대부분의 불탑이 석탑으로서, 한국 불탑의 중심을 이룬다. 우선 목탑을 살펴보면 그 재료가 목재이므로 불에 타기 쉬워서 여러 차례의 방화로 모두 타버리고 고대에 만들어졌던 목탑의 실물은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 목탑이 있었던 흔적으로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지와 사천왕사 목탑지, 광덕사 목탑지 등이 남아있다. 백제시대의 목탑 유적으로는 부여 군수리 사지의 목탑지와 금강사 목탑지를 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것으로는 평양 청암리 사지의 목탑지와 평안남도 대동군 상오리 사지의 목탑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조선시대 후기인 17세기 초반의 건축물인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 팔상전은 옛 목탑의 양식은 오늘에까지 전해주고 있는 유일한 목탑의 유구이다.(국보 제 55호) 전탑은 탑을 건립하기에 앞서 인공을 가하여 벽돌을 생산하여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아 전국적으로 파급되지 못하고 지역에 따라 일부에서만 건조되었다. 모전석탑도 전탑과 같이 석재로 벽돌형을 다듬어 모전석을 생산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크게 유행할 수는 없었다. 청동탑과 금동탑 등 금속제 탑들은 건물내의 봉안탑으로 만들었던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건조물로서의 탑파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공예탑 혹은 공예품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탑과는 달리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채취되는 우리 나의 자연적인 조건 아래서는 석탑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천 여기의 탑파 가운데 대부분이 석탑이고 그 모양도 다양하여 다채로운 수법을 보이고 있어 한국의 탑파를 이해하고 탑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큰 석탑에 대한 것을 아는 것이 빠른 길이다. 이렇듯 석탑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된 까닭은 질 좋은 화강암이 풍부한 자연적 조건과 일찍부터 돌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도나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한다면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삼국 시대
 한국 석탑의 발생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되며,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시기로서 이와 같은 목탑의 경영과 그 전통의 연마가 마침내 석탑을 발생케 하였다. 즉, 석탑 건립에 앞서 목탑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목탑은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양식의 조형을 따라서 누각형식의 다층(多層)으로 사각형 또는 다각(多角)의 평면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현재 남아 있는 당시의 유구(遺構)로써 뒷받침된다. 한국에서 석탑을 제일 먼저 세운 나라는 백제인데, 그 양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당시 백제는 3국 중에서도 건축기술이 가장 발달해 있었다. 그것은 백제가 ‘사탑심다(寺塔甚多)’의 나라로서 널리 국외에까지 알려진 사실이나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빙된 사실, 그리고 일본 초기 사원의 창립을 위하여 사공(寺工)·와박사(瓦博士) 등이 건너간 역사적 사실 등으로 증명된다. 이렇듯 백제에서는 특히 건축술이 발달하여 그것은 마침내 백제 말기인 7세기 초에 이르러 석재로 목탑을 모방한 탑파를 건립하게 됨으로써 석탑의 시건(始建)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백제 때에 건조된 석탑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은 전북 익산시(益山市) 금마면(金馬面) 미륵사지(彌勒寺址)석탑과 충남 부여읍(扶餘邑)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 2기가 있다. 그것은 모두 화강암을 재료로 사용하고 가구(架構) 수법이 매우 견고한 점이 특징이다. [백제] 미륵사지석탑(국보 11)을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석탑으로 보고 석탑의 시원을 여기에 두는 까닭은 이 탑이 하나의 석조건물이면서도 양식이 목탑과 흡사함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즉, 이전에 선행(先行)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목재 대신 석재로 바꾸어 충실하게 구현하였기 때문에 석탑 발생계열에서 마땅히 그 선두에 두는 것이다. 각부의 구조는 기단부가 목탑에서와 같이 낮고도 작은 편이다. 탑신부에서 초층 옥신은 각면이 3칸씩인데 중앙 1칸에는 사방에 문호(門戶)를 마련하여 내부로 통하게 하였으며 그 내부 중앙의 교차점에는 거대한 사각형 석주가 있다. 이것이 곧 이 석탑의 찰주(擦柱)인데, 이처럼 사각형 석주가 지탱하고 있는 것도 목탑의 형식과 같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 수법의 직사각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가설하였으며, 다시 두공(枓)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있어 옥개석을 받고 있는데 이것 또한 목조건물 가구를 본뜬 것이다. 2층 이상의 옥신은 초층보다 훨씬 낮아졌으나 각층 높이의 차이는 심하지 않으며, 각부의 가구수법은 약화(略化)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옥개석은 얇고 넓은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을 보이며 2층 이상의 옥개석은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었을 뿐 두공양식의 3단 옥개받침이나 전각의 반전 등 각부는 초층과 같은 수법이다. 이 석탑의 원형은 7층 또는 9층으로 짐작되며 건립연대는 《삼국유사》에 의하여 무왕대(武王代)인 600∼641년경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미륵사지석탑은 7세기 초에 건조된 탑으로서 목탑 가구의 세부까지도 석재를 가지고 충실하게 모방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석탑을 이룩하였다. 이 석탑 양식이야말로 백제에서의 목탑 유행에서 석탑이 발생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실물로 보여주는 예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제 9호)은 부여 읍내 동남리의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이 목조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는 유구임은 물론이고, 각부의 양식 수법이 특이하여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귀중한 존재라 하겠다. 즉, 이 석탑은 일견하여 목탑의 구조를 모방하였음을 곧 알 수 있는데,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층 우주(隅柱)에 보이는 엔타시스 수법, 얇고 넓은 각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의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옥개석 하면의 목조건물 두공을 변형시킨 받침수법, 특히 낙수면 네 귀퉁이의 두두룩한 우동마루형 등에서 목탑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현재 상륜부(相輪部)를 결실한 노반석까지의 석재가 149개로서 이것만으로도 이 탑이 목조가구(木造架構)의 번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부 수법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이고 있다. 전체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의 미륵사지석탑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그 시원에서는 다소 벗어난 발전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석탑발달의 과정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유구(遺構)이다. 이 석탑의 건조시기는 7세기 전반기의 미륵사지석탑 다음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백제에서 건조된 석탑 2기는 똑같이 석재를 사용하여 목탑을 모방하면서 발생하였으므로 이 두 탑은 목탑계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신라] 신라의 석탑은 전탑의 모방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받침의 형식 등이 전탑 양식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은 아니고 전체에 하나의 양식 발생사적인 계열이 있다는 의미이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시의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국보 30)이다. 이 탑은 얼핏 보면 전탑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구성재료는 전(塼)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석탑은 634년(선덕여왕 3)에 완성된 것으로 백제의 무왕대와 같은 시기인데 신라 석탑의 출발은 여기에 있었다. 분황사 석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 기단을 갖추고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탑재는 백제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安山岩)이다. 또한 이 석탑은 이 안삼암을 소형의 직사각형 벽돌모양으로 절단하여 쌓아올림으로써 전탑형을 이루었으며, 백제석탑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탑 건립에서 석재에 대한 집착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고, 탑의 초층 4면에는 감실(龕室)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 인왕입상(仁王立像)이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일부 화강암재의 혼용은 있으나 근본적으로 주재(主材)가 안산암이었고 양식 또한 백제석탑과는 같지 않아서 거의 때를 같이 하여 7세기 초에 발생한 양국에서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통일 신라 시대 삼국 통일의 새로운 계기를 맞아 집약 정돈된 형식으로 건조된 석탑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양식의 표본을 보이고 있는 것이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의 감은사지 동, 서 3층 석탑과 경주시 암곡동(현재는 국립 경주 박물관 마당에 옮겨 세웠다)의 고선사지 3층 석탑이다. 이 두 석탑이 똑같이 새로운 통일 국가의 도읍지인 경주를 중심으로 역사적 전환을 통해 새로운 하나의 석탑 양식이 발생되었다는 사실에 주의를 끌게 한다. 감은사지 3층 석탑(국보 제 112호)은 현재 동해구 대종천 북쪽 언덕의 감은사 옛터에 동서로 쌍탑이 있다. 이 동, 서 쌍탑은 서로 같은 형식, 같은 규모인 신라 최대의 3층 석탑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부와 상륜을 차례로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상하 기간의 양식 또한 이 석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양식은 이후 한국 석탑에서 하나의 전형으로 정립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이 형식을 오래도록 지켜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이러한 초기의 석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각부의 구성이 백제시대의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곧 목조 건축의 구조성을 잃지 않고 있는 증거라 하겠다. 또 하나의 시원 석탑으로 고선사지 3층 석탑(국보 제 38호)을 들 수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에 상하층 편석과 갑석이 여러 개의 석재로 결구 되었으며, 특히 하층 기단 면석의 탱주가 3주인 점등은 역시 목조 건축을 모방한 신라 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을 잘 보이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고선사에는 일찍이 원효대사가 살았었던 사실이 있고, 그가 돌아가신 것이 신문왕 6년(686)이니 이 석탑의 건립 연대는 하한을 686년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석탑의 건축 양식으로 보아도 타당한 추정일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특징적인 것으로 주목되는 점은 초층 답신각면에 호형을 조각한 점이다. 이렇듯 탑신부에 문비조각을 한 것은 이 석탑이 가장 오래 된 예이며, 의성 탑지 석탑과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감은사, 고선사의 양탑과 같은 석탑의 초기 가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복잡성이 간략화 되어,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나원리의 5층 석탑(국보 제 39호)에서 탑신은 2층 이상부터, 옥개석은 3층 이상부터 모두 1석씩이며, 탑신에 양 우주가 각춘되고 옥개석에는 하면에 층계 받침이 마련되었을 뿐이다. 초층 탑신의 구성은 각면 판석과 우주가 1석으로 합쳐졌고, 4매의 면석은 엇문림식으로 구성되었으니 여기에서 간략화의 경향을 알 수 있다. 한편 경주시 구황리 3층 석탑(황복사지 3층 석탑, 국보 제 37호)기단부의 양식은 앞에서 이야기한 석탑들과 같으나 하층 기단면석의 탱주가 3주에서 2주로 변화했다. 그리고 탑신도 각면 판석 조립식이 아닌 1석으로 만들었으며, 우주도 따로 석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각 층 탑신석 양 모서리에 각출하여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단일성의 경향은 기단부나 탑신부 할 것 없이 석탑 전체에 미치게 되어 앞선 시대의 복잡한 가구 양식이 간략화 되었으며, 기단과 탑신부의 균형도 높고 큰 기단과 방대한 탑신부가 시대가 떨어지면서 거의 비슷한 크기로 되어 감을 볼 수 있다. 경주 불국사의 3층 석탑(속칭 석가탑, 국보 제 21호)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불국사 3층 석탑과 같은 양식 수법에 속하는 석탑으로 금릉 갈항사지 3층 석탑(국보 제 99호) 동, 서탑 2기와 경상북도 창녕군 창녕읍의 술정리 동 3층 석탑(국보 제 4호),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봉기동 3층 석탑(보물 제 113호), 경주시 마동의 장수곡 3층 석탑, 월성군 서면 명장리 3층 석탑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석탑에서는 별개의 각부 부재를 가구한 수법을 찾을 수 없고, 전형 양식과 같은 수법을 표현한 석재를 중첩하여 구성하고 있으니 여기서 우리는 한국 석탑에서 가장 일반적인 전형 양식의 정형을 보게 된다. 이러한 유례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의 탑 건립은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여 전형적인 양식의 전형기를 맞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내려가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9세기에 들면서 점차로 변형이 나타나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경문왕 10년(870)경에 건립된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의 보림사 동, 서 3층 석탑(국보 제 44호)을 들 수 있다. 이 석탑은 상층 기단 면석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고 옥개석이 평박해졌으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아주 심하다. 그러나 이 석탑에서는 하층기단의 탱주가 아직도 2주이고, 옥개 뱓침도 5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 말기로 들어서면 석탑 자체의 규모가 작아질 뿐아니라, 각부 양식도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기단부의 석재가 줄어들고 각 면석의 탱주도 간략화 되며, 탑신부도 층마다 옥개석 변침의 층수가 줄고 있다. 이러한 변형은 조형 미술품 자체의 양식적인 변화에서 일어난 결과라고도 하겠으나 이세기 이후 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 군웅의 할거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예술도 힘찬 기상에서 섬약해 감에 따라 조형 미술품도 그 규모가 작아지고 각부 양식도 간략, 혹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기단부의 구조가 2층 기단이라는 기본형을 벗어나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낮은 하층 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로 바로 하층 기단이 놓이게 된 형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층 기단을 갖춘 석탑에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지대석을 마련한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간혹 통례와는 달리 지대석 대신 자연 암반 위에 기단 면석을 조립한 석탑을 볼 수 있으니 경주 남산의 용장사곡 3층 석탑(보물 제 186호)을 들 수 있겠다. 한편 이러한 형식의 석탑은 다음 왕조인 고려시대의 석탑 건조양식에 크게 영향을 주어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2층 기단의 석탑이 유행되는 한편, 이러한 유형도 많이 건조되어서 그 유례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전형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는 석탑이 건립되는 한편 이들 기본 양식과 형태를 달리하는 '이형적인 석탑'의 측면을 보게 되었다. 즉 신라 성대인 8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는 전반적으로 건축적 결구 의사가 단일된 조각적인 의사에도 농후하게 기울어져 가는 동시에 탑파 자체에 장식적인 의장이 강하게 나타남으로서 전대에 볼 수 없었던 비건축적인 장식적 석탑의 유행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 건조된 석탑의 이러한 동향은 비단 석탑뿐만 아니고 일반적인 신라 중대 후기 문화의 동향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특이한 형태의 석탑을 고찰함에 있어서 좀 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형태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이형적인 석탑으로서 건조 방법이나 각 부재의 결구 양식이 전형적인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외관상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것으로서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석탑은 대체로 8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다보탑과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 300호), 월성군 정혜사지 13층 석탑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둘째, 장식적인 석탑으로 기단 및 탑신부의 각 면에 천인상과 안상, 팔부신중, 십이지신상, 사방불, 보살상, 인왕상 등 여러 상을 조각하여 표면 장식이 화려하며 장중한 탑이다. 이러한 류에 속하는 석탑은 월성군 원천사지 동, 서 3층 석탑을 비롯하여 구례군 화엄사 서 5층 석탑(보물 제 133호), 경주 남산리 서 3층 석탑(보물 제 124호), 전라북도 남원군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보물 제 10호),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지 3층 석탑(국보 제 122호),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 신월동 3층 석탑(보물 제 465호), 국립 중앙 박물관의 산청 범학리 3층 석탑(국보 제 105), 전라남도 광양군 옥룡면 중흥산성 3층 석탑(보물 제 112호), 국립 경주 박물관의 남산 승소곡 3층 석탑 등을 들 수 있겠다. 셋째, 탑신부는 방형 중층의 전형을 보이고 있으나, 기단부에서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석탑을 들 수 있다. 즉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관우리 도피 단사 3층 석탑(보물 제 223호)은 탑신부는 방형 평면이나 기단부에서는 8각형의 평면을 이루어 하층 기단 면석에 안상이 장식되고 상층 기단 상하 갑석에 앙복련을 조식하여 마치 불상의 대좌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월성군 석굴암 3층 석탑은 상하 2층 기단이나 그 평면은 면석과 갑석이 동일하지 않고 면석은 8각형으로서 각 모서리에 우주가 각출되었고 갑석은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곧 이웃 석굴암 보존 여래상의 대좌를 모방한 것이 아닌 가도 생각된다. 넷째, 모전석으로 건조한 것이 아니나 외형으로 보아 모전석탑의 형태와 비슷하게 보이므로 이러한 석탑을 이른바 모전석탑류라 칭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의성 탑리 5층 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선산군 죽장동 5층 석탑(국보 제 1103)과 경주의 서악리 3층 석탑(보물 제 65호), 경주 남산리 동 3층 석탑(보물 제 124호)등은 이에 속한다. 다섯째, 청석탑류의 고찰인데, 이것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고려시대이다. 그 시발은 신라로 보아야 할 것인 바,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 석탑(보물 제 518호)을 신라시대 건조물로 추정함과 동시에 가장 오래된 청석탑으로 주목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신라시대에 나타난 특수형 석탑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첫째로 꼽은 '이형적인 석탑'이라 하겠으며, 그 중 다보탑의 화엄사 4사자 4층 석탑을 대표적인 이형탑이라 할 수 있겠다.  불국사 다보탑은 '다보불 상주증명의 보탑'이라는 데서 유래된 탑명이다. 다보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 양식을 종합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평면 경영에서 전형 양식의 기본인 방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바, 탑신부와 옥개석 등 각부를 8각 부재로 복잡하게 가구하였으나, 상하 부분이 서로 균형된 비율과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 둘째로, 기단부 사방에 보계를 가설하였다. 셋째로, 상층 기단에 방주를 세우고 목조 건축의 두공을 연상시키는 받침부를 시설하였다. 넷째로, 갑석의 신부에 가구한 상하부의 난간과 죽절형 석주 및 앙련 대석등은 마치 목조구조를 방불케하고 있다. 다섯째로, 전부재의 치석과 결구 수법의 문제인데, 화강암은 이렇듯 목재 다루듯이 석재로서 수려하여 각 부재를 조성하여 촉감마저 온유한 조형미를 보이고 있음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의 경지로 빠져들게 한다. 또 하나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곧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이다. 이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수 양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상층 기단의 구조에 있어서 판석으로 이루어진 면석을 조립한 것과는 달리 4마리의 원각지 사자를 배치함으로써 각면의 양 우주와 탱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둘째는, 하층 기단 면석의 각면에 여러 종류의 천인상을 각양각태로 조각하고 초층 탑신에도 각면에 문비들 모각한 좌우에 인완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양각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고려시대
 고려 시대의 석탑에 관하여 살펴보면 우선 그 석탑 건립이 전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분포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일반적인 추세는 한마디로 왕실 불교적 입장에서 출발한 한국의 불교가 수백년을 지나면서 보다 보편화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석탑에서 좀 더 주목을 끄는 것은 순수한 지방 세력 내지는 많은 사람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이다. 고려 석탑이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사실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 지방민의 발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석탑의 전국적 분포나 토착 세력의 참여는 바로 고려 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그리하여 신라시대의 전통성과 함께 지방적 특색이 가미되어 그야말로 다양한 조형을 이루었다.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는 어느 정도 신라 석탑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세부에 변형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예천읍 내의 개심사지 5층 석탑은 연화문이 조식된 판석 11개를 끼워 탑신 괴임대를 삼고 있으며 정도사지 5층 석탑은 하층기단 면석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있고 그 내면에 지선으로부터 귀꽃문이 조식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고려 석탑의 새로운 양상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지방적인 특색을 현저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데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신라 시대의 양식을 충실하게 본받고 있으나 백제의 옛 땅인 충정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백제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라북도나 충청남도 지방에 백제 탑계의 양식을 따라 만들어진 고려 석탑이 곳곳에 세워졌던 것이니 몇 개의 예를 들면 충남 지방의 부여군 무량사 5층 석탑, 서천군 비인 5층 석탑, 공주군 계룡산 남매탑 등이 있고 전라북도 지방에 있어서는 익산군 왕궁리 5층 석탑, 정읍군 은선리 3층 석탑 등이 있다.  고려기에 이르러 보이는 특수한 양식으로서 전체적인 변화를 보이는 것은 다음에 열거하는 석탑에서와 같이 방형의 범주를 벗어나 다각형으로 그리고 다층으로 변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렇듯 방형의 기본형을 벗어나 평면이 다각으로 변한 석탑의 유례를 몇 가지 들어보면 강원도 평창군의 월정사 8각 9층 석탑(국보 제 48호), 금각사 6각 다층석탑, 평양시의 영명사 8각 5층 석탑, 평안남도 대동군의 원광사지 6각 7층 석탑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과 같이 6각, 8각도 아닌 원형의 평면을 보이는 석탑이 있으니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군 다탑봉의 많은 석탑 중에서 원형 다층석탑과 원구형 석탑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곳 다탑봉에는 운주사가 있고, 이 절의 남쪽 낮은 계곡을 따라 곳곳에 크고 작은 각종의 석탑과 불상이 배치되어 이른바 천불천탑이라 일컫고 있다. 이곳에는 양식이 다른 석탑이 산재하여 일반형 석탑 이외에 모전석탑, 이형석탑 등 10여기의 석탑이 서 있는데, 이와 같이 많은 석탑을 집중적으로 건립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이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특징적인 것의 하나인 풍수설의 유행으로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불사나 건탑을 유치한 실례와 지방 세력의 건탑 사실 등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곳의 유적은 크게 주목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재료상의 문제에서 빚어지는 또 하나의 특수성을 지니는 ` 청석탑 ' 유형이 유행했음을 유례를 통하여 알 수 있겠다. 이러한 류의 석탑은 석재 그 자체가 크지 못하므로 모두가 작은 규모인데 석질 또한 약하여서 각 부재가 파손 혹은 결손되어 완형은 거의 없다. 한편 고려시대에 이르면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탑의 부분적인 면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석탑의 탑신부에 연화석 등으로 괴임대를 마련하거나 기단 갑석 그 자체가 연화 대좌로 이루어지고 또는 각 층에 괴임석을 끼워 마치 공예탑과도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 몇 기를 보면 개심사지 5층 석탑 (보물 제 53호, 현종 원년, 1010), 전라남도 구례군 논곡리 3층 석탑 (보물 제 53호), 경기도 개성시 흥국사지 석탑, 서울 경복궁 홍제동 5층 석탑 (보물 제 166호, 정종 11년, 1045) 등이 있다. 끝으로 고려시대 말기의 건립으로 새로운 형식의 석탑인 경천사 10층 석탑 (국보 제 86호, 제 29대 충목왕 4년, 1384)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석탑은 전부재가 회색의 대리석으로 그 구성은 기단부 위에 탑신과 상륜부가 건조되었는데 각부는 평면과 부재의 구조 등에서 특수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2층으로 이루어졌고 그 평면은 4면 두출성형의 아자형을 취하고 있다. 각 층의 면석에는 각기 불, 보살, 인물, 초화, 반룡 등을 양각하였으며 각 모서리에는 절목 원주형을 모각하였다. 상륜부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원형의 평면으로 노반과 연구문형의 복발과 앙련으로 될 앙화가 있고 그 위에 보탑형과 보주가 있다. 그런데 이들 상륜의 각 부재는 때의 라마적 수법을 엿볼 수 있어 주목된다.
조선시대
 고려말의 여세로 몇 기의 탑을 남긴 초기의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을 들면 다음과 같다.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7층 석탑(보물 제 489호, 제 7대 세조대 건립), 경기도 여주군 신륵사 다층 석탑(보물 제 225호, 제 9대 성종 3년, 1427년 건립), 경상남도 함양군 벽송사 3층 석탑(보물 제 474호, 제 11대 중종 15년, 1529년 건립) 등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서 방형 중층의 신라 석탑의 기본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은 벽송사 3층 석탑이다. 이것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하고 있어 신라식 일반형의 전형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낙산사 7층 석탑을 볼 때 이 석탑의 구조는 일반형 석탑과 같이 평면이 방형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상륜부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석탑은 순수한 일반형 석탑과는 끼워져 있어 특이한 가구가 주목된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흰색의 대리석으로 건조한 방형 석탑인데 2층의 기단부를 구성하고 그 위에 여러 층으로 중적한 탑신부를 받고 있다. 이런 양식은 신라나 고려시대의 일반형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으나 각 부재의 세부 조형은 전혀 짐작을 달리하는 석탑이다. 임진왜란 이후 곧 조선 후기에 건립된 석탑 중 그 건립 연대가 확실한 충청북도 청주시의 보살사 5층 석탑이 있어 이를 고찰함으로써 후기 양식의 일면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석탑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짜여진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구축하였으며 그 위에 5층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이다. 그리고 각 층의 비례도 잘 맞지 않고 옥개석도 투박한데 기단부가 다소 넓어서 그런 대로 안정감을 보이고 있으나 역시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퇴화된 불교 미술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특수형 석탑은 그리 많지 않으며 다음의 몇 기 뿐이다. 서울특별시 파고다 공원내의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 2호, 제 7대 세조 12년), 경기도 남양주군의 수송사 8각 5층 석탑(제 9대 성종 24년, 1493), 경기도 남양주군의 묘적사 8각 다층석탑(제 11대 중종 초년대 - 16년, 1506 - 1521년 추정)이 있는데, 이 가운데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석탑은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이것은 비록 한국 석탑 중 후대에 속할 지라도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수법이 세련되고 의장이 풍부하여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우수작이라고 하겠다. 이 석탑은 전체의 부재와 대리석인데 전면에 화려하게 가득 찬 조각이 석재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서 한층 더 아름답다. 이 탑은 전체의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전체에 조식된 불상의 조각 등이 고려시대에 건립된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더욱 주의를 끌게 한다. 다음으로 수종사 8각 5층 석탑을 살펴보면 평면이 8각인 원당형을 이룬 석탑으로 한국에 현존하는 희귀한 8각 석탑 중의 하나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안정감이 있고 경쾌한 조형을 보이는데 과거 두 차례에 걸친 전면 해체 복원 작업에서 발견된 유물과 기록에 의하여 제 9대 성종 24년(1493)에 건립한 이후 제 16대 인조 6년(1628)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묘적사 8각 다층석탑을 살펴보면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구축하고 그 위에 탑신부를 형성하였으며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형태이나 전체가 8각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곳 묘적사는 수종사와 불과 8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조형물도 밀집한 연관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묘적사 8각 다층석탑을 수종사 8각 5층 석탑에 비교해 보면 기단부로부터 탑신부와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같은 양식수법을 보이고 있어 같은 사람이 건립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