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dolmen: 支石墓/지석묘)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나, 한국의 고인돌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는 없는 듯하다.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九州]에도 분포하나,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로도 부르고,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하며, 기타 지역에서는 돌멘(Dolmens)이나 거석(巨石,Mega-lith)으로 부른다.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일본에서는 죠몽 만기에서 야요이 중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 동남아시아에서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거석숭배 사상에 의해 만들어 졌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자연환경 조건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던 선사시대 사람들은 영원 불멸의 자연물 즉 돌에 대한 숭배나 신앙심에서 거대한 바위를 이용한 기념물을 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시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다시 활동할 수 없게끔 시체를 매장한 뒤 큰 돌로 덮은 것이다. 주로 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 위, 산기슭, 고갯마루 등 사람이 활동하는 주면에 세웠는데, 이는 무거운 돌을 얻고 옮기기 쉽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거석문화는 자연석이나 가공한 돌을 사용한 건조물로, 고인돌 외에 선돌(立石) ·열석(列石)·환상열석(環狀列石)·돌널무덤(石棺墓)·돌무지무덤(積石墓)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의 상한 연대에 대해 신석기시대 축조설과 청동기시대 축조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축조설은 고인돌이 씨족 공동 무덤의 성격을 띠며 그 주변에서 뗀석기(타제석기), 빗살무늬토기편 등이 출토된다는 점에 근거한다. 청동기시대 축조설에는 다시 기원전 20000年代 말과 1000年代 초기 ·중기설이 있다. 기원 2000年代 말설은 중국 요녕지방의 고인돌 연대에 비기는 것이며, 기원전 1000年代 초설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형성과 관련 짓는 입장이다. 기원전 1000年代 중기설은 1960年代 초까지 북방식 고인돌의 연대로제시된 주장이다. 하한 연대에 대해서는 청동기시대 전기말설, 후기설, 기원후설 등이 있다. 청동기 시대 전기 말설은 세형동검 문화보다 앞선 기원전 4세기 전후의 비파형 동검 문화 시기로, 후기설은 기원전 3~2세기 또는 서력 기원전후인 세형동검 문화 시기로 본다. 기원후 1세기와 4세기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 기원후설은 금석병용기 시대 혹은 가야계 수혈식무덤방과 연결시켜 보는 입장이다. 대체적으로는 기원전 3~2세기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고인돌 각 형식 간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식이 앞선다는 설과 남방식이 앞선다는 설이 있으나, 시간적 관계 판단에 필요한 유물이 워낙 미미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들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점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전 8,7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거나, 아무리 이르게 보아도 기원전 5세기를 넘을 수 없다는 주장 등을 하여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인돌은 크게 나누어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 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보다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의 출토 유물에는 크게 석실 안에 부장했던 의례용 유물과 석실 주변에서 발견되는 실생활용 유물이 있다. 의례용 유물은 무기류, 공렬토기류, 장신구류 등이며, 가장 많은 것은 무기류인 간돌검과 돌화살촉이다. 간돌검은 보통 1점씩 출토되나 돌화살촉은 여러 점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당시 특수계층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이 많고 뚜껍창이나 청동도끼, 청동촉도 있다.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남단 특히 여수반도에서많이 출토되며, 공렬토기로는 붉은 간토기(紅陶)와 가지문토기(彩文土器)가 출토된다. 고인돌에서는 출토된 인골을 보면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 묻은 것이 보통이지만, 한쪽 단벽의 개폐가 쉬운 북방식 고인돌의 경우는 무덤방 안을 몇 개의 칸막이로 막은 공간에 인골이 흩어져 있어 여러 사람을 묻은 특수한 예다. 서유럽의 고인돌은 여러 사람을 매장한 공동묘가 대부분이며, 중국 요녕성에는 바로펴묻기(伸展葬)와 굽혀묻기(屈葬)가 많으나 한 무덤방 안에 여러명의 시신을 화장한 예도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선 크게 자생설, 남방설, 북방설 등 3가지 설이 있다. 자생기원설은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가장 밀집 분포하고 형식도 다양하며, 주변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것이다. 이 설은 고인돌이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고 또 오랜기간 축조되어 어느 지역의 고인돌보다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남방기원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도작(稻作)문화와 함께 중국 동북해안 지방과 한반도에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우리나라에서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등 서해안을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고,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와 고인돌의 분포 지역이 일치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하지만 중국 동해안 지역 가운데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은 절강성뿐이고 그나마 40여 기에 지나지 않는 데다 형태도 다르기 때문에 고인돌의 기원과 이 지역을 관련 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북방기원설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요녕지방의 돌널무덤에서 발전했다고 본다. 돌방무덤의 뚜껑돌이 1매석으로 대형화되면 개석식(蓋石式)고인돌이 되고, 지하의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면 북방식 고인돌이 된다는 것이다.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거의 세계 전역에 분포하며, 그 분포 지역은 바다에 인접한 곳에 밀집해 있다. 그 중 동북아시아의 중국에는 절강성에 40여 기와 요령성에 300여 기가 있으며, 일본에는 600여기, 한반도에는 3만여 기가 분포한다. 대동강 유역의 1만여 기와 전남 지방의 2만여기가 그것이다. 이는 55,000여 기의 거석물 가운데 순수 고인돌은 수천 기뿐인 유럽과 거석물이 수백 기에 불과한 동남아시아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형태의 유사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지만, 중국 요령지방 주변과 시베리아등 북방 지역에서 서유럽 사이에는 고인돌이 분포하지 않는다. 고인돌은 농경문화, 세골장(洗骨葬)풍습, 난생설화 등 남방문화의 요소가 보이는 한편 북방문화의 요소인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문화의 유물이 껴묻거리(부장품)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 기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이제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의 중심 분포지가 우리나라이고, 형식도 북쪽에는 북방식이, 남쪽에는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유사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요녕성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남·북방의 문화를 융합한 독자적 고인돌문화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세운우는 북방식 고인돌은 잘 다듬은 판석 3~4매로 짜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상의 돌을 얹는 것으로, 책상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 으로도 부른다. 대형 북방식은 요동반도와 한국 대동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것 으로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남방식 고인돌은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로 쌓은 무덤방(墓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碁盤式)으로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 지방에서만 보이며 무덤방은 없는 것이 많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을 괴었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구주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는 지석이 없는 남방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 고인돌의 무덤방은 돌널형(石棺形)·돌덧널형(石槨形)·구덩형(土壙形)·독널형이 있으며, 평면은 긴 네모꼴이 대부분이다. 돌널형과 돌넛형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보이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씩 형태가 다르다. 특히 독널형은 일본 구주 지역의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인돌에서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고인돌이 세골장(洗骨葬) 혹은 이차장(二次葬)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거대한 돌의 운반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것이 족장(族長) 등 지배계급들의 묘(墓)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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