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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Open강좌/미술용어

남종화_南宗畵 / 남화_南畵

by 태풍되고픈천둥 2012. 7. 19.

남종화(南宗畵) / 남화(南畵)

 

 명(明)나라 때 막시룡(莫是龍)·동기창(董其昌)이 제창한 화가의 계통 및 화풍. 남화(南畵)라고도 한다. 북종화(北宗畵)에 대응되는 말이다. 북종화가 화원(畵員)이나 직업적인 전문화가들을 중심으로 경직(硬直)된 선묘를 사용하여 그린 장식적이면서도 공필(工筆)의 그림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남종화는 대체로 인격이 고매하고 학문이 깊은 사대부(士大夫)가 여기(餘技)로 수묵과 담채(淡彩)를 사용하여 그린 간일(簡逸)하고 온화한 그림이다. 당나라 초기 남북2종설(南北二宗說)은 명나라 때 동기창이 《화지(畵旨)》 《화안(畵眼)》 등 그의 문집 속에서 당대(唐代) 선종(禪宗)에 남·북종이 있음을 주목하고, 회화에서도 남·북종의 구분을 한 데서 비롯된다. 【기원】 이러한 구분은 동기창과 동향인으로 친교가 있었던 막시룡의 《화설(畵說)》에서도 대체적인 요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작성한 남종화의 계보에 의하면, 남종화는 그 비조(鼻祖)를 당나라의 문인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왕유(王維)로 삼고, 이후 당말(唐末)의 장로(張路), 오대(五代) 및 송나라 때의 형호(荊浩)·관동(關同)·동원(董源)·거연(巨然)·곽충서(郭忠恕)· 미가부자(米家父子:米柰? 米友仁)를 거쳐 원말(元末) 사대가(四大家:黃公望·倪瓚·吳鎭·王蒙)로 이어지며, 명나라 때의 심주(沈周)·문징명(文徵明) 같은 오파(吳派)의 문인화가들도 이 계보에 속한다. 한편 북종화의 계보는 당대(唐代) 이사훈(李思訓) 부자(父子)의 착색산수(著色山水)로부터 송(宋)나라의 조간(趙幹)·조백구(趙伯駒)·조백숙(趙伯)으로 전해져 마원(馬遠)·하규(夏珪)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남·북종론을 제창했던 동기창은 예림백세지사(藝林百世之師)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문예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니만큼 명시적(明示的)은 아니었지만, 남종화를 존숭하고 북종화를 경시하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남종화의 정통성을 결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명·청대(明淸代)의 중국에서는 남종화의 전성기를 맞았다.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으나 남·북이라는 용어에 따른 이의가 적지 않았다. 남·북이란 화남(華南)·화북(華北) 등 화가들의 출신지에 따른 구분이라는 설이 계속 나왔다. 그러나 이미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심호(沈顥)도 그의 저서 《화진(畵塵)》 에서 “선(禪)과 화(畵)는 함께 남북(南北)이 있다”라고 밝힌 바 있듯이 선가(禪家)에서의 남북구분(南北區分)에 수반되는 개념과 같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회화에서의 남북 분종(分宗)의 주안점은 순전히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의 의경(意境)에 입각한 것으로, 북종화는 외형묘사를 위주로 한 사실적(寫實的) 영향을 지향하는 데 반하여, 남종화는 작가의 내적 심경(內的心境), 즉 사의표출(寫意表出)을 의도한다고 볼 수 있다.

 

【문인화와의 관계】 이러한 사실은 남종화와 문인화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남화와 문인화는 원래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문인화란 화업(畵業)을 생업으로 하지 않는 사대부계급에 속한 자가 여기(餘技)로 그리는 그림을 가리켰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후한(後漢) 말 2세기 장형(張衡)·채옹(蔡邕) 때에 문인화가 그려졌다는 말이 된다. 그 후 육조(六朝)·당송대(唐宋代) 북송(北宋)에서 소동파(蘇東披)나 문동(文同)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문인화 집단이 형성되고, 문인화란 외형적 닮음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뜻을 그려내야 한다는 문인화론의 대체적 윤곽이 제시되었다. 이 시대까지만 해도 문인화는 이렇다 할 정해진 양식이 없었는데, 원말 4대가에 이르면서 대체로 하나의 양식적 면모를 갖추었다. 부드럽고 온유한 필법을 몇 번이고 중첩하여 그렸으며, 색채도 담묵화(淡墨畵)가 주로 쓰였다.  문인화가 이처럼 양식적 개념으로 변모하였을 때 그들이 택한 양식이 바로 남화의 양식과 맥(脈)을 같이 한다. 명나라 때 중반의 심주·문징명 등 오파가 활약하던 15세기에 남화는 문인의 적극 참여로 점점 융성하였다. 17세기에는 많은 남화가(南畵家)가 배출되면서 남화는 전통을 지닌 하나의 양식으로 화단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회화적 상황하에서 동기창의 ‘상남폄북론’이 제시되었다. 그 당시 동기창은 문인화의 계보도 만들었는데, 문인화의 비조 역시 왕유이고 그 뒤 이성(李成)·범관(范寬) 등을 거쳐 이용면(李龍眠)·미가 부자로 이어져 원말 4대가와 심주·문징명으로 계승된다. 문인화 계보는 남화의 계보와 일치되며, 이 때부터 남화와 문인화의 혼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 남화의 세력이 강화되어 문인 신분이 아닌 전문화가까지 남화를 그렸다.  청대(淸代)에 들어서면서 남화는 더욱 성해지고, 사왕오운(四王吳5)이라고 하는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 왕휘(王)·왕원기(王原祁)·오역(吳歷) 및 운수평(5壽平) 등이 남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체로 틀에 박히고 형식화된 기미가 강하였고, 청나라 때의 궁정화가에게까지도 원용되어 남화를 그리게 되었다. 회화사상 청조남화(淸朝南畵)에서 주목할 것은 이런 정통파 화가들보다도 오히려 석도(石濤)·팔대산인(八大山人)을 필두로 한 개성파(個性派)들이었으며, 이들은 대개 명나라의 유민으로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감과 내적 감정을 작화(作畵)의 밑바닥에 깐 화가들이었다. 궁정화가들마저 남화 일로로 치닫던 18세기 말, 상업의 중심지였던 양저우[揚州]를 중심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개성표현을 구가하였던 화가 일파가 나타났다. 김농(金農)·정섭(鄭燮)·이선(李鮮)·황신(黃愼)·나빙(羅聘) 등 8인의 화가로서 이들을 양저우팔괴[揚州八怪]라고 한다. 이들은 중국 남화의 최후를 장식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청나라 중기 이후 남화가의 수는 급증하였지만, 세속에 영합한 직업화가에게까지 널리 파급되었으며, 습기(習氣)에 흐르는 경향이 짙었다.

 

【한국 남종화】 이러한 명·청대(明淸代) 중국남화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 남화나 남종문인화론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조선 후기의 숙종(肅宗)·영조(英祖) 연간이다. 종래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에서 보면 이러한 화관(畵觀)은 보다 일찍 전하여졌을 법하지만, 조선 중기의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전란으로 인하여 문화활동이 침체되었고, 불유쾌한 대청관계(對淸關係) 및 대명숭상(對明崇尙)의 잔존으로 인하여 청나라로부터의 새로운 화관의 수용이 더욱 늦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남종화풍은 조선과 청나라 관계가 점차 안정된 숙종 후반기에 도입되기 시작하여 영·정조 이후에 와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남종화는 베이징[北京]을 다녀온 사행원(使行員)과 화원들에 의하여 전래된 진작(眞作)이나 방작(倣作)을 통해 파급되었지만,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등을 비롯한 명·청대의 화보(畵譜) 등도 남종화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남종화는 조선왕조 화실에 18세기 초엽부터는 본격적으로 침투하여 선비화가들은 물론 화원들도 보편적으로 이를 따랐다. 이 시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남종문인화가로는 이인상(李麟祥:1710∼60)· 강세황(姜世晃:1712∼91), 신위(申緯) 등이다. 물론, 이에 앞서서 후기화단의 선두로서 탁월한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남긴 정선(鄭敾)도 남종화에 좋은 소폭작품을 남겼고, 그의 제자인 심사정(沈師正)도 중국남화에 육박할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하나의 풍조나 격식으로서의 남종문인화는 영·정조 시대에 기틀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인상의 고아간담(古雅簡淡)하며 문기(文氣) 넘치는 화면이나, 강세황의 단아한 필법에 의한 중국남화의 대가들에 대한 다양한 방작(傲作) 등을 통해 당시 예단(藝壇)의 남화수용에 대한 열의를 알 수 있다. 강세황의 뒤를 이어 신위는 청조문인들과의 직접적 교유를 통하여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기량을 묵죽(墨竹)에 쏟았다. 윤제홍(尹濟弘)의 간략한 구성과 수채화같이 맑은 분위기를 창출한 이 화풍은 김수철(金秀哲)· 김창수(金昌秀)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남종화풍의 폭넓은 유행은 문인화가뿐만 아니라 화원들의 그림에서도 역력히 나타난다. 김유성(金有聲)이나 이재관(李在寬)은 소재선정이나 처리면에서 남종화법을 그 나름대로 수용하여 정형화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장기(匠氣)가 군데군데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남종화풍의 진정한 유행과 토착화는 김정희(金正喜:1786∼1856) 일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유불(儒佛)의 동양적 사고를 배후에 두고 시서화본일률(詩書畵本一律)이라는 문인화의 세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김정희의 작품은 중국 문인화의 세계와 상접(相接)한 경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김정희의 비호 아래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 여러 화가가 배출되고, 묵란(墨蘭)의 대가 이하응(李昰應)과 민영익(閔泳翊), 괴석(怪石)의 작가 정학교(丁鶴喬) 등이 여기에 가담하여 조선 후기의 심원한 문인화풍이 진작되었다. 한편, 남종화가 조선 후기의 화단을 지배하게 되고 사회적 수요는 역시 사대부계층에 있었으므로, 이에 부응하여 화원들도 거의 남종산수를 그렸다. 그러나 남종화단의 흉중구학(胸中丘壑), 즉 마음 가운데 자리잡은 산수를 그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철리(哲理)나 유교적 교양이 정리되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화원에게서는 남화라 해도 형식주의의 도말(塗抹)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선 후기 남화가의 수도 많았지만 작품상의 가치면에서 쇠운(衰運)을 면치 못한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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