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미술(Byzantine art)
5∼15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회 사회에 발전한 그리스도교 미술. 단 4세기 이전에도 준비 시기가 있었으며(예를 들면,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 교의(敎義)·정치·군사 상의 이유로 6세기 이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콥트(이집트)·누비아· 에티오피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러시아 등이 그곳으로, 그 지역의 미술은 비잔틴미술과의 연결은 다소 있으나, 각각의 독창성이 차차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보통 이것을 3기로 나누며,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이다. 이스탄불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즉위한지 6년째인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커다란 폭동이 일어났다. 비잔츠 사의 자료에서 데모이(民衆)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은 종종 커다란 정치적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수도장관과 황제를 내모는 봉기(蜂起)로까지 발전했다. 이와 같은 시위운동의 발단이 되는 곳은 히포드롬스(마차경기장)였다. 마차경기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를 통해 익숙해진 경기로 경기롤 보러 온 군중은 조를 나눠 응원을 했으며 모인 군중은 조마다 그때의 여러 가지 요구와 불만을 그곳에서 황제에게 直訴할수가 있었다. 마차경기장은 황제와 민중이 직접 마주 대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경기장의 단체 가운데 청조와 녹조는 차츰 경기장의 응원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지닌 黨派로 성장해 갔다. 532년 청조와 녹조가 소동을 일으켜 수도장관은 그 주모자를 체포, 사형을 宣告했고 경기장에서 시민은 그것을 취소하도록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조와 녹조는 한데 뭉쳐 니카(승리)를 외치며 수도장관 관저를 불태웠고 황제宮의 일부, 하기아 소피아 성당, 하기아이레네 성당이 불에 탔다. 이것이 니타의 난이다. 暴徒의 기세에 놀란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목숨을 부지하지 말고, 황제의 옷을 입은 채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라"고 황제에게 엄하게 말하는 황비의 말에 용기를 얻어 봉기의 진압에 성공했고 이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황제는 자신의 治世로 비잔틴제국 최대의 榮華와 領土를 차지한 것이다. 난이 平靜된 뒤, 곧바로 착수한 것이 불타버린 하기아소피아성당의 재건이었다.
【건축】 비잔틴 건축가는 토목공사나 궁전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빈 비르 딜레크[千一柱]라고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大貯水所) 등에서 그 편린이 엿보이나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다. 성당 건축은 한편으로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기능에 따른 계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는 강한 상징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위해서는 사제(司祭)를 위한 제실(祭室) 및 내진(內陣)과, 신도(信徒)를 위한 신랑(身廊)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대 말기의 공공건축의 종장식(縱長式: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제실은 거의 언제나 반원상(半圓狀)으로 돌출하고, 반원 모양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 모양의 지붕은 신의 자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로는 오히려 원 모양의 지붕이 상징성이 강하다. 비잔틴 건축의 스타일은 그리이스식의 십자형의 정방형평면과 로마세계의 돔양식을 둘다 빌려 왔다. 그 결과는 돔으로 된 진흙, 벽돌조의 키로키티아 집들에 기묘하게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틴 大帝가 4세기 초에 기독교를 공인하여 그때 건축은 교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비잔틴 건축은 기독교를 실천하도록 새로운 자유를 북돋았을 때였다. 비잔틴 건축가들은 그들 스타일에 기본을 이루는 십자형의 상징에서 강한 건축형태를 발견하였다. 그리이스 십자형이라 命名된 이같은 형태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 신앙생황을 할수 있도록 지붕이 있는 공간을 제공했으며, 평면은 돔으로 덮힌 중앙에 焦點이 固定되었고 초기 기독교의 길다란 본당과 회랑이 있는 순수한 바실리카형태와 대조되었다.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해 비잔틴 건축가는 사각형의 평면 위에 둥근 돔을 지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둥근 원통형 단면 위에 세워진 로마식돔은 비교적 해결이 용이했다. 시라아인은 사면을 팔면을 바꾸는 삼각슬햅을 구석에 놓아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고했으나 하단에서 삼각형 석재부분이 보인다는 것은 둥근형태와 조화되지 않았다. 달마티아의 스팔라토아에 있는 팔각 모슬리엄에서 로마인은 벽돌조 보울트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스퀸치라고 알려진 공법에 의해 3개의 벽돌조 아치는 삼각돌 까지 突出하여 그것을 덮어 감추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折衝的 해결에 불과했다. 마지막 아치의 면은 둥근 형태와 여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펜덴티브(pendentives)라 불리는 볼록하게 굽은구석사면의 밑동과 돔의 원형 밑동 사이와의 흐름을 이어주는 소피아 대성당이 건축됨으로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십자가의 象徵을 追求하는 비잔틴건축가의 결정과 그들의 예술적 순수성의 연출은 그들의 강렬한 信念을 보여준 것이다. 돔 원통형, 그리스 십자형(Greek Cross)은 비잔틴 교회건축의 주요한 요소들이다. 높고 긴 돔 형탑과 사원하부의 사각형 몸체와의 결합된 효과는 비잔틴 교회를 강렬한 형태로 만들었다. 중요한 점은 성소피아와 같은 거대한 성당이든 카프니카리아 같은 작은 교회이든 패턴은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형태는 축제분위기와도 같이 복잡한 것이었다. 중앙 돔은, 돔의 호를 따라 놓여 있는 로마식 타일로 덮혀있으며 때때로 그 돔의 가장자리는 수평적이었고, 원통형이나 탑에서 눈썹처럼 창문의 아치모양 위로 곡선을 이뤘다. 종종 중앙 돔은 십자형 팔익부와 구석간 위에 다양한 높이로 서 있는 작은 돔의 그룹으로 둘러싸여 있다. 콘스탄티노풍에서 석재는 유용하지 못했다. 가장 유용한 재료로 - 벽돌용 진흙덩이, 콘크리트용 자갈이 가장 많이 쓰였고, 대리석과 기둥용 巨石은 지중해변에 있는 채석장으로부터 輸入을 해야했다. 한정된 재료를 사용하여 가능한 한 매우 풍부하게 장식을 했다. 두께가 1.5인치(4cm)쯤 되는 벽돌 타일과 돌블록 사이에 모르타르가 뚜껍게 바라졌다. 타일과 돌은 줄을 번갈아 놓였는데, 타일은 변칙적으로 배치되었으며 돌은 엄격한 규칙아래 놓였다. 내어 쌓기는 지붕밑에 조각용 프리즈로 사용되었고, 프리즈는 창옆과 아치 위에서 얇고 동근 벽됼 리브(rib)로 서 이어져 있다. 에테네의 스몰 메트로폴리스경우처럼 석재작품은 복잡한 형상과 형태로 조각되었다. 이런한 세부적인 것들이 융합되어 건축작품을 거대하고 장엄한 조각품으로 만들었다. 원 모양의 지붕을 씌운 집중식 건축은 성스러운 천계(天界)로 덮인 종교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 원형은 고대 로마에도 있으나 5세기부터 세례당(洗禮堂), 묘당(廟堂), 순교자 기념당 등으로 우선 발달하였고(라벤나의 갈라 플라키디아 묘당 등), 그것이 점차 대형화하여 성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전례(典禮)를 위해서는 제실과 주랑(主廊)을 직선으로 늘어놓고 다시 거기에 전실(前室:세례 지원자용)과 앞뜰(일반인용)을 추가한 종장식 설계가 편리하므로 집중식의 경우도 대부분 바실리카 구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장식미술】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聖化)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된다. 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 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聖像)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아이코노클래즘 운동을 8∼9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벽화· 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 따위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기둥머리, 내진 장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 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예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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