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 1853.3.30~1890.7.29)
'또 돌아와서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손에서 붓이 떨어지려고 한다. 나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다시 3점의 대작을 완성한다. 그것은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보리밭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나는 충분한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테오에게의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오베르의 종말기에 그는 옆으로 길게 된, 그에게 있어 새로운 규격의 그림을 시도했다. 지평선에의 넓은 전망에 대한 그의 잠재의식이 예견한 종말의 의식과 함께,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거기에 까마귀가 활개치며 나르는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그는 영혼의 고독과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앞날의 예감도 어둡다. 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보는 것은 전혀 되지 않는다.' 절망감은 그를 못견디게 하고 있다. 1853년, 네덜란드 남쪽의 작은 마을 프로트 준데르트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하지만 점원이라는 직업은 그의 격정적인 성격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목사가 되기를 결심한 그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전도사의 길을 걸으며 미래의 자신을 준비하지만 그 역시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프랑스의 아를르에 정착하면서부터 고흐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이미 그의 나이가 서른을 넘어선 시기였다. 북프랑스의 오베르에 있는 가셰박사의 병원 생활과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는 4~5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진정으로 찾아 헤맸던 내면 세계로의 여행을 떠난다. 1879~1880년경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고흐는 데생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밀레의 작품들을 모사하며 수많은 습작으로 데생에서 가능한 모든 테크닉을 익히고 실험했다. 188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그의 색조는 은은한 서정성과 함께 어둡고 두터운 색조를 보이며 변화를 꾀한다.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그리고 급속하게 변화된 그의 회화 기법은 1886년 파리에 정착하면서 활짝 피기 시작했다. 색조를 분할하고,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어지럽게 진동하는 붓의 터치는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인물 중심의 풍속화]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쌩 레미를 떠나 오베르 쉬르 와즈로 간 고흐는 의사 가셰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준비한다. 그는 일시적인 진정의 상태를 맞이했지만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이성을 잃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포비슴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고흐가 살다간 세기말은 우울한 시대였다.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리얼리즘과 인상주의가 시대적인 방황을 틈타 등장했으나, 이들은 금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본질적인 정신세계를 직시했던 고흐에게는 외부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회화 세계는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절망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고흐는 그들의 빛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빛에 의해 반사되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 그 자체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태양은 그의 내적 세계를 신과 연결시켜 주는 절대적인 길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많은 태양의 그림이 등장한다. 회오리치는 듯한 그의 태양들은 정신적인 혼돈의 세계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 갈등의 폭만큼이나 거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이 있다.
우키요에 ( 浮世繪/부세회 )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부터 에도[江戶]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의 한 양식. 일반적으로는 목판화(木版畵)를 뜻하며 그림내용은 대부분 풍속화이다. 그러나 우키요에라는 말은 일본의 역사적인 고유명사로, 보통명사로서의 풍속화와는 구별된다. 전국시대를 지나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 벼락부자, 상인, 일반 대중 등을 배경으로 한 왕성한 사회풍속·인간묘사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성행하여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쓰가와 S쇼[勝川春章]·도리이 기요나가[鳥井淸長]·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 등 많은 천재화가를 배출시켰다.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에 들어서면서 사진·제판·기계인쇄 등의 유입으로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애호되어 프랑스화단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반 고흐와 아르토 예술의 반란, 이성에 대항한 광기의 불꽃
절망과 좌절, 고독 속에서 예술의 불꽃을 사르다 간 반 고흐와 잔혹극의 선구자 아르토. 그들은 비극적 인생만큼이나 예술적 정신적으로 교감을 이루고 있다. 아르토는 고흐를 내면 깊숙이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대변해 주었던 시대와 장르를 뛰어넘은 정신적 동반자였다. “자연에는 폭풍우의 드라마, 인생에는 고통의 드라마가 있다”고 말했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마침내 1890년 7월 29일 1시 30분 37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을 때, 그의 가장 가까운 후원자이며 의사였던 가셰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절망하지 맙시다. 우린 빈센트의 친구들이니까. 빈센트는 죽지 않았소. 그는 결코 죽지 않을 거요. 그의 사랑, 그의 천재성, 그가 창조해 낸 위대한 아름다움은 영원히 살아남아 세상을 살찌울 겁니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볼 때면, 언제나 거기서 새로운 믿음,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었지요. 그는 거상(巨像)이었고, … 위대한 화가, … 위대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예술을 향한 사랑 앞에 순교한 것입니다.”(어빙 스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관에 뚜껑이 덮여진 뒤 1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으나, 과연 가셰 박사의 말대로, ‘그의 사랑, 그의 천재성, 그가 창조해 낸 위대한 아름다움’은 시대를 뛰어넘어 위대한 불멸의 성좌로 더욱 찬연히 빛나고 있다. 생전에는 하루에 3프랑 50전을 받는 지붕밑 방의 집세를 지불하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던 반 고흐의 그림 <가셰 박사의 초상>이 1990년 5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8천2백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계량화된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한 예술가의 진정한 가치가 그림 값의 높낮이로 규정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당시 50프랑 정도의 가격에 자신의 그림이 팔린다면 “숨을 좀 돌릴 수 있을 것”(《고흐의 편지》)이라고 말했던 고흐의 처지에 비해, 오늘날 고흐 작품의 ‘교환 가치’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생에는 고통의 드라마가 있다.” “고흐에게 있어 예술은 개인적인 운명과 불가분의 것이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곧 그의 전 존재의 작렬이자 그의 불안 또는 기쁨의 절규이다. 또한 그의 생애는 어떤 회화 이념의 전개이기보다는 차라리 한 영혼의 소진이요, 어떤 미학적 모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정신적·사회적 비극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타고난 재질에 찢기우면서도 자신의 정열의 포로가 된 한 인간의 비극이다. ‘진정한 삶’이 거부된 그는 회화 속에서 자신을 구하고 마침내는 그 속에 자신을 불살라버린다.”(쟝 레이마리) 반 고흐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예술과 개인적 운명을 하나로 통합한 한 영혼의 소진과 한 정신의 비극을 송두리째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고흐만큼 자신이 맛본 쓰라린 삶의 고배의 대가를 예술 속에 전적으로 투영시킨 예술가가 있을까. 자신의 모든 열망과 고뇌를 예술화함으로써“정신적인 구원 내지는 자기 변혁의 깊고도 실천적인 수단으로서의 예술의 전형”(마이어 샤피로)이 된 위대한 화가가 바로 반 고흐이다. 그는 1853년 3월 3일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지방의 한 가난한 마을 그로트 춘데르트(Groot Zundert)에서 태어났다. 16세 때에 백부의 소개로 하아그에 있는 화구상의 점원이 되어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다가 목사의 아들이라는 가정 환경의 영향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고흐 자신의 말) 종교적 정열에 불타 단기 목사 양성소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한때 벨기에에서도 가장 비참한 탄광촌인 보리나쥬를 무대로 헌신적인 전도에 몰두한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천부의 재질(현재 남아 있는 그의 최초 데생은 9세 때의 것이다.)을 숨길 수 없었던 고흐는 화가가 되기를 결심한(1880년) 후, 브뤼셀을 거쳐 1881년 봄에 에텐의 부모 곁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사촌뻘 되는 케이 포스에게 구혼했다가 깊은 사랑의 상처를 입고 집을 뛰쳐나온 그는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계속한다. 그 곳에서 우연히 밤거리의 창녀 크리스틴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모델로 해서 그린 누드 데생 <슬픔>은 “버림받은 인간에 대한 애절한 공감”을 표현한 매우 감동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예술 속에 투영시킨 화가 1883년 말경부터 1885년 11월 파리로 떠나기까지 약 2년 동안 그는 무려 유화 2백 점, 데생 2백50점을 남기는 본격적이며 열띤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이른바 ‘네덜란드 시대’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에 그려진 고흐의 리얼리즘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후 파리에서 화상으로서의 기반을 갖고 있던 동생 테오도르의 도움으로 코르몽 화실에 출입하면서 툴루즈 로트렉·피사로·드가·쇠라·고갱 등의 인상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이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어두운 화면이 갑자기 점묘풍(點描風)의 밝은 색채로 바뀌게 되고, 1888년 2월 남프랑스의 아를르로 옮겨간 뒤부터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해 나간다. <해변의 작은 배> <해바라기> <아를르의 카페> 등은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 해 10월, 고갱이 와서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견해와 작풍이 판이하게 서로 달랐던 두 사람은 잦은 성격의 충돌로 상호간의 우정이 깨어져, 마침내 고흐가 면도칼을 휘두르며 고갱을 죽이려고 쫓다가 오히려 자기의 귀를 잘라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소동을 벌인다. 아무튼 이 ‘귀 자르기 사건’을 계기로 고흐와 고갱은 헤어지게 되고 그 후 신경증의 발작 증세가 악화되어 아를르의 시립병원을 거쳐, 1889년 5월 생 레미에 있는 생 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다. 요양 생활을 하면서도 작품 제작에 왕성한 의욕을 보여 <버드나무가 있는 보리밭> <추수> <별과 달이 있는 밤> <병원의 안뜰> 등 1백50여 점을 그렸다. 그는 생 폴 요양원으로부터 야외 제작을 때때로 허가받기는 했으나 점점 그 곳이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사랑하는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 꼭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 근방의 시골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흐는 파리 북쪽 34킬로미터 떨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 오베르 쉬르 우와즈(Auver Sur Oise)에 사는 의사 가셰 박사의 손에 넘겨지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이 완성된 지 얼마 안되는 1890년 7월 27일 오후, 오베르 성에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에다 권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 “아 내 작품들, …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었지. … 그러다가 내 정신이 거의 다 결딴났어. …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어빙 스톤, 《빈센트 반 고흐》라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다 두 눈을 영원히 감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신경증의 발작과 요양 생활, 특히 ‘귀 자르기 사건’과 ‘권총 자살’로 마감한 고흐의 비극적 생애에 대해서, 범속한 ‘정상인’들은 한편의 광인의 드라마쯤으로 쉽사리 간주해 버린다. 그리고 동생 테오와 가셰 박사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없었던들 광인인 반 고흐가 그 많은 작품들을 제작할 수 없었으리라 단정한다.
아르토의 고흐론은 그 자신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고흐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광기의 권리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고흐를 통해서 절망과 좌절로 점철된 자신의 입장을 재인식한 것이며, 같은 정신의 핏줄을 잇는 동지를 만난 것이다. 반 고흐와 아르토가 보여준 예술의 반란, 그것은 17세기 이래의 근대 유럽을 지배해 온 이성의 체계에 대항한 광기의 불꽃이라 할 수 있다.
잔혹극의 선구자 아르토, 고흐와 동일한 삶의 궤적 그러나 “그림으로서밖에는 그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던”(고흐의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테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진정한 예술가 반 고흐를 또 다른 차원에서 바라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의 경우는 일반적인 정상인의 시각과는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요지부동의 것으로 고착되어 있는 지금까지의 고흐의 ‘광기의 신화’를 감히 부수려고 시도한다. 아르토는 폴 클로델과 알프레드 쟈리와 더불어 20세기 연극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연극 혁신자, 특히 ‘잔혹 연극’의 선구자로 알려진 독특한 천재이다. 1991년 봄 극단‘반도’에 의해서 국내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첸치 일가(Les Cenci)>는 이탈리아의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따온,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 및 그 복수와 형벌을 그린 피비린내나는 ‘잔혹’의 주제를 다룬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잔혹’이란 ‘두개골을 톱질한다’든가, 잘린 두 개의 피투성이 목을 상자에서 꺼내 보이는 것 같은 육체적인 공포의 동의어가 아니라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잔혹,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잔혹”이다. 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적이거나 윤리적인 잔혹이 아니라 ‘인생’ 또는 ‘필연성’에 결부되는 존재의 고통 그 자체, 즉 존재론적 잔혹이다. 그러기에 아르토는 연극을 식후의 오락과 같은 것, 인생의 단순한 재현으로 보기를 거부하며, “매일 밤 항상 같은 관습에 따라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진짜 현실, 일회성의 것, 즉 배우의 삶 그 자체이며 또한 관객의 삶이기도 한 ‘일종의 사건’으로 생각한다. 반 고흐가 예술을 개인적인 운명과 불가분의 것으로 보았듯이, 아르토 역시 연극을 ‘두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 현실 그 자체, 삶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 고흐와 아르토는 매우 긴밀한 정신적 상통 관계, 또는 동류항으로 묶을 수 있는 형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게다가 어렸을 때 뇌막염을 앓고 난 아르토가 그 후유증으로 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마약을 복용하고 신경발작을 일으켜 정신병동 또는 요양원에 갇히는 등 정신의 분열 과정을 체험했다는 점에서도 반 고흐와 거의 동일한 광기의 궤적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르토는 유달리 반 고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반 고흐-사회가 자살시킨 사람》이라는 주목할 만한 반 고흐론을 남겼다. 1947년 봄 파리의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개최된 반 고흐전을 보고 극도의 열광 상태에 빠진 아르토는 《반 고흐-사회가 자살시킨 사람》을 쓰게 되는데, 이 에세이로 이듬해 생트 뵈브 비평상을 받게 된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미술 에세이 같기도 하고 산문시 같기도 하며 또한 주문(呪文) 같기도 한 일종의 단상집으로서, 계속된 전기 쇼크 치료와 투약으로 피해망상증에서 막 벗어난 상태에서 쓴 반정신분석적인 이론 전개를 펼친 매우 이색적인 글이다. 거기서 아르토는 1947년의 반 고흐전을 계기로 발표된 신문·잡지 기사들 가운데서 고흐를 ‘변질 정신병 환자’로 진단한 정신과 의사의 논문을 특별히 문제삼아 격앙된 어조로 비판한다. “나 자신도 정신병원에서 9년 간이나 지낸 적이 있지만, 항상 자살하고 싶은 망상에 사로잡혀 끌려다니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침 회진 시간에 정신분석 의사와 말을 나눌 때면, 상대를 목졸라 죽이지 못할 바에는 내 자신이 목을 매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아르토, 《반 고흐-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고흐의 ‘광기의 신화’에 새롭게 접근한 아르토 물론 아르토의 반 고흐론은 정신분석 의사의 섣부른 진단에 대항한 지나친 적의(敵意)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림으로서밖에는 그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던” 투철한 화가의 ‘골똘한 생각’, 저 광적인 ‘정신 집중’의 세계를 또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근하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반 고흐의 눈은 대천재의 것이다. 그리고 눈이 화면에서 뛰쳐나와 나 자신을 해부하는 것 같고,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그 뛰어난 솜씨를 보면, 이미 그것은 화가의 천분이 아니고 내가 일생 동안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철학자의 천분인 것이다.”(아르토, 《반 고흐-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아르토는 소크라테스조차도 갖고 있지 못했던, 다만 니체만이 갖고 있었던 눈, “육체를 혼에서 해방시키고, 정신의 속임수를 발가벗긴” 눈이 바로 <귀를 싸매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에 나오는 반 고흐의 눈이라고 말한다. 어찌 그런 투명한 눈을 가진 사람이 미치광이일 수 있느냐고 아르토는 항변한다.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관찰할 수 있는 명석함을 지닌 화가 고흐는 일상적 관습에 얽매여 사는 ‘정상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광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르토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면, 반 고흐는 결코 광인이 아니며 차라리 헌신적인 후원과 보살핌이라는 미명하에 고흐를 광인 취급한 동생 테오와 가셰 박사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화가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은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다. <밤의 카페>(1888년 9월)는 고흐의 ‘아를르 시대’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그의 투명한 시선이 포착한 현실 인식의 깊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적색·황색·녹색·황록색 등의 조합이 불러일으키는 밝은 색채 처리의 효과도 독특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현실 속에 살아 숨쉬는 인물들의 묘사이다. 카페 깊숙이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서 한 여자를 껴안고 있다. 그 바로 앞에는 술도 마시지 않고 혼자 말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화면의 오른쪽으로는 남자 둘이서 트럼프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각자 자신들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을 뿐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다는 태도이다. 그에 비해, 카페의 중앙에 덩그렇게 설치되어 있는 당구대 옆에 서 있는 흰옷 입은 남자는 정면의 벽시계가 12시를 넘기고 있는 시각이므로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눈을 치뜨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낯선 이국 땅의 화가 고흐를 따스하게 맞이해 주지 않는 아를르 사람들의 시선을 대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범속한 현실 세계와의 피투성이 투쟁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서 “카페는 인간이 광기에 젖으며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임을 나타내 보이려고 애썼다.”고 주석을 붙였다. 그리고 “붉은 색과 초록색으로써 인간의 무시무시한 정열을 나타내려 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른바 정상적 일상인들이 사는 세계에의 입장(入場)이 거부되고, 그 바깥에 서서 범속한 현실 세계와의 피투성이 투쟁을 끊임없이 벌여야만 했던 아르토의 고흐론은 그 자신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고흐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광기의 권리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르토는 고흐를 통해서 절망과 좌절로 점철된 자신의 입장을 재인식한 것이며, 같은 정신의 핏줄을 잇는 동지를 만난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아르토가 고흐의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미쳤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 고흐와 아르토가 보여준 예술의 반란, 그것은 17세기 이래의 근대 유럽을 지배해 온 이성의 체계에 대항한 광기의 불꽃이라 할 수 있다. 이가림 - 시인·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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