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佛畵)
황령사 아미타후불탱(黃嶺寺 阿彌陀後佛幀)
주로 사찰건물의 내벽(內壁)과 외벽(外壁)에 벽화의 양식으로 그려진다. 이 밖에 각종 불구(佛具)나 탑파(塔婆) 등에서도 부조(浮彫)양식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불화는 4세기의 불교전파와 함께 전래되었다고 보며,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신라의 화가 솔거(率居)가 황룡사(皇龍寺) 벽에 노송(老松)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 초에 사찰건물에 벽화양식의 불화가 그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찰은 모두 목조(木造)양식에 의존하였으므로, 보존상태가 오래 갈 수 없었고, 종교와 종교 간의 마찰에 의해 대부분 소실되거나 파괴되었다. 특히 유교를 숭배하는 조선시대가 성립되면서 불교의 사찰문화는 급격히 퇴조되었다. 그러나 불화가 결정적으로 수난을 당한 것은 임진왜란 때이며, 이때 전국의 주요사찰이 모두 불탔거나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불화는 몇 개의 예를 제외하고는 임진왜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화가 없고 일반적으로 해외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강희(康熙)·옹정(雍正:1722∼35)에서 건륭(乾隆:36∼95) 사이의 것이 중요한 문화재로 인정되고 있다. 한국의 불화는 4세기 말 무렵 이미 대륙에서 받아들인 불교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건축·조각양식과 더불어 한국 고대미술 발달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 유적들을 접할 수 없으므로 초기의 불화가 어떤 양식과 내용을 담았는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불교가 토착종교였던 신선교(神仙敎)와 오랜 동안의 마찰 끝에 교체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이 단순히 외래적인 모방양식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확인된다. 신라의 솔거가 노송(老松)을 그렸다는 사실은 그 점을 뒷받침해준다. 노송은 산수화(山水畵)의 일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산수화 속의 신선(神仙)들이 불상의 모습들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솔거는 황룡사의 벽화 외에 분황사(芬皇寺)의 관음보살과 단속사(斷俗寺)의 유마상(維摩像)도 그렸다. 이런 점은 불화양식이 과거의 회화양식과 습합(習合)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오늘날의 사찰건축은 많은 부분이 고유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칠성각(七星閣) 따위는 무속신앙(巫俗信仰)의 건축물로 인정된 것이다. 건축양식에 있어 이와 같은 습합성(習合性)은 당연히 회화적인 양식에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회화가 본질적으로 건축에 부속된 벽화양식에서 출발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체로 오늘날의 사찰건축에서도 불화들은 불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법당이나 금당(金堂)의 정면, 혹은 좌우벽에 그려지고 있다. 중요한 주제는 불전(佛傳)과 본생담(本生譚)이며, 그 밖에 현교(顯敎)에서 오는 각종 존상(尊像)과 밀교(密敎)적인 신상들이 다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특유의 민간신앙과 무속적인 것, 선종계열(禪宗系列)의 고승들을 비롯한 국사(國師)들의 초상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한국 불교가 걸어온 그 간의 과정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미술이 어디까지나 토착적인 미술의 영향권 속에 살아왔음을 알게 한다. 특히 사찰건물의 외벽에 그려진 불화들은 상당 부분이 무속신앙에서 볼 수 있는 신선담(神仙譚)으로 나타나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법상으로 보면 대체로 불교 자체의 퇴조와 함께 회화상의 기법도 퇴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테면 주존상(主尊像)의 표현은 시대가 내려갈수록 그 이전의 적정한 대소비차(大小比差)를 무시하고 과대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또 묘선(描線)에서도 그 이전의 원숙하고 활달한 필치가 서서히 경직되어 굵어지는 경향이다. 색상(色相)에서는 강희·건륭시대에 주조를 이루던 적·녹색이 점차 퇴조하면서 급기야 청색으로 바뀌었으며, 설채(設彩)에서도 농채(濃彩)와 담채(淡彩)의 구분이 분명했던 것에서 점차 일률적인 것으로 바뀌어 화면이 매우 두텁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불화가 점차 회화적인 격조를 잃어가는 현상이며, 더불어 불화작가들의 품격이 점차 저질화되어감을 뜻한다. 아무튼 이와 같은 한국불화의 회화양식은 일단 시원적으로 중국 육조불화양식(六朝佛畵樣式)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그 이후 시대를 달리하면서 중국불화의 화풍과 한국 고유의 회화양식이 서로 절충되면서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송광사(松廣寺)의 불화는 양적으로나, 그 오래된 것으로 단연 돋보이는 것으로 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사찰건축과 관련없이 전해지고 있는 화적(畵蹟) 중에서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판화(11세기 고려시대)를 비롯해 시대가 상당히 올라가는 것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고분벽화에 나타난 불화적인 요소:안악(安岳) 제2호 고분벽화에 나타난 연화반(蓮花盤)을 받쳐든 비천도(飛天圖:4세기 중엽), 용강(龍岡) 쌍영총(雙楹塚)벽화에 나타난 공양행렬도(供養行列圖:5세기 후반), 통구(通溝) 무용총벽화의 진악비천도(秦樂飛天圖:6세기 초), 강서 우현리대묘(江西遇賢里大墓) 중의 비천도(飛天圖:7세기 초).
② 공예품에 나타난 불화적인 작품:일본 나라[奈良]의 주구사[中宮寺] 천수국만다라숙장(天壽國曼茶羅繡帳:원화를 고구려 사람 加西溢과 東漢末賢漢奴加己利 등이 그렸다는 墨書銘이 뒷면에 있다).
③ 일본 나라의 호류사[法隆寺] 금당벽화: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었으며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나오는 담징이 일본에 조지묵채(造紙墨彩)의 법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 조사당(祖師堂)벽화에 보살상 및 사천왕상(四天王像:1737년경)이 있고,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 대웅전벽화에 수화도(水畵圖)·야화도(野花圖)가 있다. 이는 14세기 작품으로 건물 중수 때 검출되었는데 벽화는 소실되었고 모사만 남아 있다. 강진(康津) 무위사(無爲寺) 벽화(15세기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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