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뢰겔(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
네덜란드의 화가.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플랑드르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의 네덜란드는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여러 개의 독립된 주와 도시가 모인 것으로, 각각의 지방과 도시가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을 가지고 있었다. 브뢰겔은 1520년에서 3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할 뿐, 정확한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태어난 곳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며, 대체로 네덜란드 남서부의 브레다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게다가 그는 자화상이나 초상화도 하나 남아있지 않다. 처음에는 쿡에게, 그 다음에는 히에로니무스 콕의 제자가 되어 그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 후 1551년 안트웨르펜의 화가조합에 등록하고, 다음 해 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 유학하였다. 반 에이크 이래 북유럽 자연주의에서 출발한 그는 이탈리아 유학길에서 알프스의 풍경에 감명을 받고 스케치한 풍경화를 남겼는데 그 중 21점이 현존한다. 53년 귀국하여 안트웨르펜에서 제작생활을 하다가 63년 결혼, 브뤼셀로 이사하여 그 곳을 활동 본거지로 삼았다.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주로 민간전설·습관·미신 등을 테마로 하였으나, 브뤼셀로 이주한 후로는 농민전쟁 기간의 사회불안과 혼란 및 에스파냐의 가혹한 압정에 대한 격렬한 분노 등을 종교적 제재를 빌어서 표현한 작품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후로는 점차 구도가 단순화되고 인물수도 적어졌으며, 극적 요소를 버리고 순수하게 사실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농민의 실상을 묘사하게 되었다. 그는 숙명적으로 대지와 깊은 인연을 맺어 그 속에서 소박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농민을 높은 휴머니즘의 정신과 예리한 사회비판의 눈으로 관찰하면서 묘사해 나갔다. 이로 인해 그는 최초의 농민화가가 되었으며, ‘농민 브뢰겔’ 로 불린다. 이 무렵의 것으로 현존하는 작품 중 판화에 비해 유화는 50점도 안 되지만, 그 작품들은 북유럽 전통의 사실성과 이탈리아에서 배운 엄격한 선(線)의 묘사를 통하여 독특한 스타일과 취향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은 빈 미술사미술관에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다툼" "아이들의 유희" "바벨탑" 등과 4계절의 농촌을 묘사한 3점의 작품(4점 중의 1점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소장) "영아학살(兒虐殺)" "농민의 춤" "농가의 혼례"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의 "네덜란드의 속담",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의 "반역 천사의 전락(轉落)", 나폴리국립미술관 소장의 "맹인의 우화"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브뢰겔은 1569년에 세상을 떠났고, 브뤼셀의 노트르담드라샤펠 교회에 묻혔다.
농가의 혼례 1568년. 판에 유채 163cm x 114cm 피터 브뢰겔, 그도 당대의 많은 북유럽 미술가들처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안트웨르펜과 브뤼셀에서 살면서 작업했다는 것 외에는 그의 일상에 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두 도시에서 그는 1560년대에 그의 그림의 대부분을 그렸는데 그 때에 냉혹한 알바공(네덜란드의 신교도를 탄압했던 스페인 귀족)이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뒤러나 첼리니에게 미술과 미술가의 존엄성이 중요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의 소묘 작품에서 의연한 화가의 어깨 너머로 어리숙해보이는 안경을 쓴 사람이 그림을 보면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의 대조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브뢰겔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석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플랑드르의 농부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술가에 대해서 범하기 쉬운 공통적인 실수의 하나다. 우리는 흔히 작품과 작가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디킨스를 픽크윅 시의 유쾌한 패거리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거나 쥘 베른을 대단한 발명가이자 모험가로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도시 사람이었고 농촌의 순박한 생활에 대한 그의 태도는 셰익스피어와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에 있어서 목수 퀸스와 직조공 보텀은 일종의 어릿광대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시골뜨기를 우스갯거리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셰익스피어나 브뢰겔이 속물 근성에서 이러한 관행을 받아들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소박한 시골 생활은 힐리어드가 그린 신사들의 생활과 예의범절보다 덜 위장되어 있고 인간 본성의 자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인위적이고 인습적인 허식에 가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극작가난 화가들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보이려고 할 때는 하층민의 생활에서 그들의 주제를 구했던 것이다. 브뢰겔이 그린 인간 희극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시골의 결혼을 다룬 유명한 작품이 있다. 대부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도판으로는 그 진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모든 세부가 더 더욱 작게 축소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잔치는 배경에 짚을 높이 쌓아올린 헛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신부는 푸른 휘장 앞에 앉아 있고 그녀의 머리 위에는 일종의 관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로 좀 모자란 듯이 보이는 얼굴에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조용히 앉아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과 그 옆에 있는 부인은 아마도 신부의 부모인 것 같다. 그보다 뒤쪽에 앉아서 숟가락으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남자가 아마 신랑일 것이다. 식탁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데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잔치가 막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 구석에는 맥주를 따르고 있는 남자가 있고 바구니 속에는 아직 빈 조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흰 앞치마를 두른 두 남자가 들것 같은 것에 열 그릇이 넘는 파이 혹은 죽으로 보이는 것을 나르고 있다. 손님중의 한 사람이 그 것을 식탁위로 옮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배경에는 들어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고 악사들도 있다. 악사중의 한 사람은 서글프고 허기진 눈빛으로 운반되어 들어오는 음식을 바라다 보고 있다. 식탁 한 구석에는 수도사와 촌장이 앉아 그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이 잔치에서는 어딘가 아웃사이더와 같은 존재이다. 전경에는 접시를 든 채 커다란 모자를 덮어쓴 아이가 하나 앉아 있는데 음식을 핥아먹느라고 정신이 없다. 꾸밈없는 탐식의 정경이다. 그러나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겔은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점이다. 틴토레토라 하더라도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을 브뢰겔만큼 교묘한 수단으로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은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위에 올려 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 유쾌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게서 브뢰겔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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